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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따라 물따라/캄보디아 여행

캄보디아 여행(5) 앙코르 왓(Angkor Wat)

by *청담* 2019. 7. 31.

앙코르 왓 (Angkor Wat)

 

  캄보디아의 문화는

과거의 풍부한 유산, 특히 앙코르 사원에서 볼 수 있는 앙코르 시대(802∼1432)의 건축과 조각을 통해 전해내려왔다.

이 건축과 조각 유물들은 다른 문화 유적들과 함께 파괴·약탈·관리소홀로 큰 피해를 입었다. 

 

   앙코르 와트 사원 유적은 그 정교한 벽 조각, 층층의 돔, 신비주의 철학 등으로 불가사의로 꼽히는 건축물이다. 12세기 크메르 왕 수르야바르만 2세(1113~1145년 재위)에 의해 세워진 앙코르 와트는 힌두교의 비쉬누 신에게 바치는 사원과 왕의 영묘를 한데 묶었다. 크메르 제국의 옛 수도 안에 있는 앙코르 와트는 종교 건축의 황금기로부터 유래한 두 가지 고전적인 레이아웃을 하나로 결합하였다. 다섯 갈래의 탑으로 이루어진 사원 산과 이를 둘러싼 사원 회랑이 그것이다. 처음에는 힌두, 그 뒤에는 불교의 중심지로서 건축물 전체가 신비한 중요성을 띠고 있다.
  이 사원 산의 내부 성소는 나가(naga, 신화에 나오는 뱀) 형상의 난간이 있는 큰길을 통해 들어갈 수 있다. 안에는 중앙 사원이 세 개의 단 위에 서 있는데, 이 단은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며 각각 우주를 이루는 세 개의 요소—땅, 물, 바람—를 상징한다. 중앙 탑과 주변의 보다 작은 탑들은 힌두교 우주관의 중심인 메루 산의 봉우리를 상징한다. 수많은 얕은 돋을새김 조각은 힌두교 신화를 세계에서 가장 완전하게 도상화한 기록이다. 동쪽 회랑의 벽은 홍수에 빠진 우주를 묘사한 '우유 바다 휘젓기(유해교반())'로 유명하다. 크메르 제국에서는 앙코르 와트를 모방한 수많은 사원들이 나왔지만, 그 어떤 것도 이 규모에는 미치지 못했다. 앙코르 와트는 힌두 사원이었던 초기부터 훗날 수세기에 걸친 불교 사원, 그리고 오늘날에는 관광 명소로 끊임없이 제 몫을 다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앙코르 와트 [Angkor Wat]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건축)

<고대건축 기술 앙코르 왓(Angkor Wat) 사원>

 

1860년 초 프랑스 박물학자 알베르 앙리 무오(Albert Henry Mouhot)

진기한 나비를 채집하기 위해 현지 안내인 네 명과 함께 캄보디아의 밀림 속을 들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지점에 도착하자 안내인들이 더 이상 들어가지 않겠다고 버티면서

더 들어가면 몇 백 년 동안 텅 빈 도시가 나오는데

그 곳에는 주술에 걸린 수많은 유령들이 들끓고 있다고 했다.

무오는 텅 빈 도시가 있다는 말에 흥미를 느끼곤 직접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다.

안내인들을 설득해 밀림 속으로 계속 들어가던 무오는 갑자기 펼쳐진 장관에 넋을 잃고 말았다.

그는 일기에서 그 감격을 이렇게 표현했다.

 “하늘의 청색, 정글의 초록색, 건축물의 장엄함과 우아한 곡선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그리스와 로마가 남긴 그 어떤 유적보다도 위대하다.

세계에서 가장 외진 곳에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이 있었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무오가 발견한 곳은 400년 전에 멸망한 옛 도시 앙코르의 폐허로

현재 캄보디아의 북서부 시엠레아프의

톤레사프호수 북쪽 일대(일명 앙코르 지방)에 있는 돌과 벽돌로 지어진 앙코르와트 유적군이다.

앙코르와트는 도시의 사원이라는 뜻으로, 그 일대 수많은 앙코르 건축물 중에서 가장 잘 보존된 유적지인데 때로는 일대 유적군 전체를 앙코르와트라고 부르기도 한다.

무오가 앙코르와트를 발견할 당시 그곳에는 1000여 명의 승려가 기거하고 있었다.  

앙코르와트가 위치한 시엠레아프는 캄보디아 3대 도시 중 하나로 한국의 경주 같은 고대 도읍지이다.

앙코르와트에는 폭이 넓은 도로가 동서로 질서정연하게 뻗어 있고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정교하게 건축한 사원 600여 개가 세워져 있다.

그 중 10여 개는 크기가 이집트의 룩소르대신전이나 중세 유럽의 대성당과 비교할 만하다.

크메르인들은 석재를 쉽게 구할 수 없는 밀림에다 어떻게 앙코르와트 유적의 건축물들을 세웠을까?

앙코르와트 유적군에 사용된 건축 재료는 연와(벽돌) · 라테라이트 · 사암이다.

벽돌(12인치×6인치×4인치)은 서로 마주대고 비벼서 모서리를 매끈하게 한 후

조심스럽게 쌓고 라임 · 야자 · 설탕 · 덩굴식물의 수액으로 접합했다.

벽돌을 쌓은 후 벽 표면을 문지르거나 석회와 모래로 만든 회반죽을 바르고

그 위에 조각한 후 치장했다.

대부분의 벽돌은 직경 2.5센티미터, 깊이 3센티미터의 구멍을 뚫고 철제로 보강했는데

이것은 벽돌이 지정된 위치에 견고하게 설치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매우 두꺼운 벽인 경우 내부를 벽돌 조각과 흙으로 채웠다.

회반죽 사용은 9~12세기에 절정을 이루었고 그 후 쇠퇴했다.

후기에는 주로 라테라이트와 사암을 사용하여 건설했다.

라테라이트는 크메르 지역의 특수한 재료로, 공기와 만나면 단단해지고 절단하기 쉬운

철분을 함유한 점토이다. 주로 건물의 토대나 평평한 단, 계단이나 담을 쌓을 때 사용한다.

대체로 두께 16인치, 12~20인치, 길이 23~32인치로 제작했는데 때로는 보다 커다란 형태로도 만들었다. 사암은 바위를 가열하여 약 4톤의 덩어리로 잘라 사용했다.

사암으로 건축할 경우 모르타르를 사용하지 않고 매끈하게 표면을 갈아 밀착시켰다.

문틀 · 창문 · 문턱 · 조각의 하단부는 편암과 현무암을 사용했다.

    

앙코르와트 유적군의 건축은 아치를 사용하지 않고 돔을 만든 것이 특징이다.

돔 형태를 내어쌓기법을 사용하여 해결했는데 돔은 올라갈수록 두께가 얇아진다.

결론적으로 앙코르와트의 유적군의 대형 건축물은 빈틈없는 설계와 유효적절한 재료 사용 때문에

척박한 환경에서도 탄생할 수 있었다. 

▲ 하늘에서 본 앙코르 왓

 

앙코르와트 유적군은 파괴의 흔적이 완연하다.

과거 도굴꾼들이 무차별적으로 유물들을 도굴해 엄청난 가격으로 팔았는데

프랑스 작가 앙드레 말로도 자신이 도굴에 참여했다고 시인했을 정도이다.

앙코르와트 자체의 면적이 워낙 넓어 철저한 경비가 어렵기 때문에

현재도 많은 예술품이 도난되고 있다.

 그래서 무려 7000여 점이 넘는 문화재를 박물관에 보관하면서 현장은 복제품으로 대체하고 있지만

잦은 내전으로 인해 문화재를 제대로 보관할 여력도 없는 상태이다.

현재 앙코르와트 유적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됨과 동시에 위기에 처한 유적 목록에도 등재되었다.

  출처 : 세계 불가사이 여행 e-book  

 

크메르 제국은 앙코르 왕조 모두를 포함하며,

9~15세기 동남아시아에 존재한 왕국으로 현재 캄보디아의 원류가 된 나라이다.

이전에 있었던 진랍을 계승했으며

그 세력이 강성할 때는 현재의 태국 동북부, 라오스 및 베트남의 일부도 점령하고 있었다.

크메르 제국은 광대한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인 교류를 하였고,

자바나 말레이 반도의 스리비자야 제국 및 스리비자야 제국과 동맹인 사일렌드라와도 교류했다.

이 왕조의 가장 위대한 유산은 앙코르 유적을 시작으로 한 일련의 크메르 유적이다.

종교적으로는 13세기에 소승불교가 인도차이나를 장악할 때까지,

힌두교와 대승불교가 섞여 있는 신앙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