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후(자희황태후)
당나라 시대 측천무후에 이어 중국을 손아귀에 넣은 또 한 명의 여걸이 있으니 그녀가 바로 서태후다. 청나라 함풍제의 비였던 그녀는 아들이 황위에 오르면서 섭정을 시작해 곧 청나라의 전권을 장악했다.
효흠현황후, 자희황태후라고도 불리는 서태후는 1835년 팔기군의 만주족 출신인 예허나라(葉赫那拉)의 딸로 태어났다. 예허나라는 여러 지방을 전전하며 근무했기 때문에 그녀는 어린 시절 궁핍한 생활을 했다. 열여섯 살이 된 그녀는 궁녀가 되어서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했고, 곧 궁녀로 뽑혀 자금성에 들어갔다. 그녀는 운이 좋게 청나라 황제 함풍제의 눈에 들어 황제의 유일한 후계자인 재순(載淳)을 낳은 후 귀비에 올랐다.
1861년 함풍제가 사망하고 아들 재순이 여섯 살의 나이로 동치제로 등극했다. 서태후는 어린 동치제를 섭정하면서부터 정치에 직접적으로 간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먼저 함풍제 시절부터 자신을 달갑게 여기지 않던 조정 대신들을 축출했다. 함풍제의 운구가 들어오는 날, 운구를 모시고 오던 재원, 단화, 숙순 등을 파직하고 체포하여 참형에 처하거나 유배를 보낸 것이다. 이 신유정변(辛酉政變)으로 서태후는 권력의 중심에 섰다.
권력과 모정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경우에 통상적인 관념과는 달리 모정 대신 권력을 선택했던 어머니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권력은 마약과 같은 것임이 틀림없다. 우리는 모정이 절대적인 것이라고 믿고 있지만, 애석하게도 동서양의 역사를 통해 권력이 자기 자식에게 넘어가는 과정에서 이를 가로채고 놓지 않으려고 했던 어머니들이 상당히 많이 존재했다.
흔히 한(漢) 고조 유방의 왕비인 여후(呂后)와 중국 역사에서 전무후무하게 여자의 몸으로 황제에 올랐던 무측천(武測天), 그리고 마지막 왕조 청(淸)을 나락으로 밀어버린 서태후(西太后), 이 세 사람을 한데 묶어서 중국사의 3대 여걸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여걸이라는 말은 꼭 긍정적인 의미가 아니다. 이 세 사람은 순리에 따랐다면 마땅히 자기 자식에게 가야 할 권력을 가로채어 그것을 오랫동안 향유했던 이른바 역천자(逆天者)들이다.
이들은 모두 권력에 몹시 목말라 했으며 잔인한 방식으로 정적들을 제거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정권의 정통성을 중요시하는 보수적인 역사가들로부터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그렇지만 역사에는 항상 관점의 문제가 따른다. 초점을 왕조의 정통성이 아니라 절대 다수인 민중들에게 맞춘다면, 여후와 측천무후 두 사람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도 있는 사람들이다.
요부 서태후 초상. 그땐 이 인물이 미인이었나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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