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태조 이성계를 도왔던 정도전. 태종 이방원을 도왔던 하륜. 이 두 사람은 고려시대 유학자 이색의 문하생이면서도 끝내 목숨까지 빼앗는 정적이 되었다. 이들의 출신 배경과 학문, 그리고 개혁정책을 재조명한다.
일찍이 정도전(鄭道傳)은 『한(漢)나라 고조(高祖) 유방(劉邦)이 장량(張良)을 등용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 고조를 이용한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한나라를 세울 때에 일등공신 장량이 유방을 만나서 항우(項羽)를 물리치고 천하를 통일한 고사를 인용하여, 나라를 창업할 때에는 임금이 신하를 발탁해서 쓸 수도 있으나, 신하가 오히려 임금이 될 만한 사람을 찾아서 같이 나라를 세울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정도전은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 왕조를 세우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 만약 정도전이란 인물이 없었다면, 이성계는 결코 조선 왕조를 세우지 못했을 것이다.
정도전은 공민왕이 살아 있을 때까지는 자기의 힘으로 쓰러져가는 고려왕조를 일으켜 세우려고 온갖 노력을 다 기울였다. 그러나 공민왕이 돌아간 뒤에 자기의 주장을 펴다가, 도리어 실권자 이인임(李仁任) 등의 미움을 사서 9년 동안 전라도 나주와 경상도 영주·단양 등지에서 유배, 혹은 유랑생활을 했다.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그는 초라한 초가에서 살기도 하고, 가난한 농부에게서 밥을 얻어 먹기도 하고, 손수 쟁기를 잡고 밭을 갈기도 했다.
이처럼 어려운 생활을 할 때에 아내 최씨와 정도전이 주고받은 편지가 『삼봉집(三峰集)』의 「가난(家難)」에 실려 있다. 이 편지를 보면, 당시 정도전의 생활이 얼마나 어렵고, 또 터무니없는 구설수에 올랐는지를 알 수 있다. 아내 최씨는 이렇게 불평했다.
『당신은 평상시에 부지런히 글을 읽느라고 아침에 밥이 끓는지 저녁에 죽이 끓는지를 알지도 못하시니, 집안 형편이 어려워 곳간이 텅 비어서 한 톨의 식량도 없었습니다. 방 안에 가득한 아이들이 춥다고 보채고 배고프다고 울었으나, 제가 끼니를 도맡아서 그때그때 꾸려나가면서도, 오직 당신이 독실하게 공부하여 뒷날에 입신양명(立身揚名)하시면, 처자(妻子)들을 남이 우러러 보도록 만들고, 가문의 영광을 가져오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끝내 나라의 법을 어겨서 이름이 욕되고 행적이 깎이어, 몸은 남쪽 지방에 귀양 가서 지독한 풍토병을 앓으시고, 형제들은 쓰러져 가문(家門)이 여지없이 망하니,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된 것이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현인(賢人), 군자(君子)라는 것이 진실로 이러한 것입니까?』
정도전이 아내에게 답장을 쓰기를,
『당신의 말이 참으로 옳습니다. 나에게 친구들이 있어서 그 정의가 형제보다 나았으나, 내가 패망한 것을 보고서 그들은 뜬구름처럼 흩어져버렸습니다. 그들이 나를 걱정하지 않는 것은 본래 권력으로 맺어진 것이지 은의로 맺어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부부의 도리는 한번 맺어지면 일생토록 변하지 않는 것이니, 당신이 나를 원망하는 것은 나를 사랑해서이지, 미워해서가 아닐 것입니다. 또 아내가 남편을 섬기는 것은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과 같은데, 이러한 이치는 쓸데없는 것이 아니라 다 같이 천성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당신이 집안을 걱정하는 것과 내가 나라를 근심하는 것이 어찌 다를 바가 있겠습니까? 각기 자기가 맡은 직분을 다할 뿐입니다. 사람의 성공과 실패, 이익과 손해, 영예와 치욕, 그리고 잘하고 못하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지, 사람에게 달린 것이 아닌데, 그 무엇을 걱정하겠습니까?』라고 했다.
이 편지를 보면, 당시 정도전이 얼마나 가난에 쪼들리고, 또 홀로 낙담하고 절망했던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이성계 찾아간 정도전
그러나 나이 40대가 되자, 정도전은 가만히 앉아서 현실에 절망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자기의 운명을 개척해 나갔다. 그가 42세가 되던 1383년(우왕 9년) 가을에 정도전은 함주(함흥)에 있던 동북면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 이성계(李成桂)의 군영(軍營)을 찾아갔다. 말하자면 자신의 힘만으로는 개혁에 한계성을 절실히 느꼈기 때문에, 당시 왜구를 소탕하여 「구국의 영웅」으로 추앙받던 이성계의 힘을 빌려서 나라를 개혁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성계의 군영으로 찾아간 정도전은 이성계 군영의 지휘 체계가 엄격하고, 군사 조직이 질서정연한 것을 보고, 매우 감탄했다. 『참으로 훌륭합니다. 이만한 군대를 가지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하니, 이성계는 『그게 무슨 말인가?』 하고 물었다. 정도전은 짐짓 핑계대기를 『이만한 군대라면 동남방의 근심거리인 왜구를 물리칠 수 있다는 뜻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때 그는 군영 앞에 서 있는 늙은 소나무 한 그루를 보고, 이성계에게 시를 한 수 지어서 바치겠다고 청했다. 그는 즉석에서 나무를 하얗게 깎아서 그 위에 시를 썼다.
『아득한 세월에 한 그루 소나무 [滄茫歲月一株松]
몇 만 겹 푸른 산 속에 자랐도다. [生長靑山幾萬重]
잘 있다가 다음해에 서로 만나 볼 수 있을는지? [好在他年相見否]
인간세상 굽어보다가 곧 큰 발자취를 남기리니[人間俯仰便陳踵]』
이 시는 이성계를 늙은 소나무에 비유하여 읊은 것이다. 앞으로 때가 되면, 이성계는 천명(天命)에 따라 인간 세상을 구원하러 나서야 하며, 또 자기와 손을 잡고 큰일을 하여 인간 세상에 위대한 발자취를 남길 것이라고 은근히 부추기고 있다.
1383년(우왕 9년) 8월에 정도전은 「변방을 편안하게 하는 방책(安邊之策)」이라 하여 국방에 관한 문제를 이성계에게 건의했다고 하는데, 정도전이 함주의 군영을 찾아갔던 까닭은 이러한 자신의 아이디어를 이성계에게 진언(進言)하기 위한 것이라고 추측된다. 그때 이성계는 정도전이 제시한 계책을 기꺼이 받아들인 것 같다. 그 이듬해인 1384년(우왕 10년) 여름에 정도전은 이성계의 막료가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정도전은 이성계와 인간관계를 돈독하게 맺게 되었으며, 이 때부터 정도전은 이성계를 섬겨서 그가 죽을 때까지 변함없는 충성을 다했다.
당시 정도전은 자기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막강한 군사의 힘이라는 보호막이 필요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가 모시고 큰일을 도모할 사람으로서 이성계라는 인물을 선택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조선왕조의 창업을 위하여 한쪽은 지략으로써, 한쪽은 군사의 힘으로써 서로 협력했던 것이다.
풍수지리 밝았던 하륜
하륜(河倫)은 1365년(공민왕 14년) 겨우 19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했다. 그러나 1368년(공민왕 17년)에 감찰 규정(監察糾正)이 되어, 당시의 집권자 신돈(辛旽)의 문객(門客)을 규탄하다가 신돈의 미움을 받아 파직됐다. 이때 그의 외삼촌 강회백(姜淮伯)이 위로하기를, 『너는 장래에 재상이 될 만한 인물이니, 결코 시골에 묻혀서 살지는 않을 것이다』고 했다.
그가 42세가 되던 1388년(우왕 14년)에 최영(崔塋)이 철령위(鐵嶺衛) 문제로 군사를 일으켜 명(明)나라 요동(遼東)을 정벌하려고 했다. 하륜은 이를 반대하다가 양주(襄州)로 귀양을 갔다. 그러나 이성계 일파에 의한 위화도(威化島) 회군(回軍)이 성공하자 그는 곧 귀양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우왕(禑王)이 폐위되고 그의 아들 창왕(昌王)이 옹립된 직후인 1388년(창왕 1년) 여흥(여주)에 유폐되었던 우왕은 김저(金佇) 일파와 모의하여 이성계를 암살하려고 계획했다. 이 사건이 발각되자 하륜은 이색(李穡) 이숭인(李崇仁) 권근(權近) 등과 같이 우왕을 지지하는 유학자 일파로 간주되어 또 유배를 당했다.
이처럼 하륜은 고려 말엽의 유학자로서 이색 정몽주(鄭夢周) 정도전 등과 함께 친명파(親明派)에 속했으나 조선왕조를 세운 이성계 일파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그가 46세가 되던 1392년에 조선이 건국되었는데 이때부터 정도전이 권력을 잡고 전성기를 누렸으나 하륜은 언제나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나서 지방의 관찰사와 부사 같은 한직에 머물렀다. 그는 조선왕조를 세우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정도전 남은(南誾) 등의 개국공신파에게 견제당하여, 중앙정계에서 자기의 역량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현실의 어려움을 타파하기 위하여 하륜은 풍수지리학을 통해서 여러번 권력을 잡을 수 있는 기회를 얻으려고 노력했다. 하륜은 이색의 문생(門生)으로서 정도전과 함께 정통 유학을 공부한 사람이었으나,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과 관상학(觀相學) 등의 잡설(雜說)에도 일가견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불교와 도참설(圖讖說)을 배척하고 정통 유학의 이론만을 고집하던 정도전과 다른 점이었다. 당시 정통 유학자들은 이러한 잡설을 배격했다. 그러나 하륜은 이러한 잡설에까지 정통했기 때문에 오히려 그의 사상은 고루한 유학자와는 달리 현실성과 다양성을 지녔다고 할 수도 있다.
1393년(태조 2년) 3월에 나라에서 계룡산(鷄龍山)으로 천도(遷都)하려고 하자, 하륜은 계룡산의 형세를 비운(悲運)이 닥쳐올 흉한 땅이라고 주장하여 천도 계획을 중지시켰다. 이리하여 하륜은 풍수학에 일가견이 있는 인물로 인정을 받아 권력의 핵심에 접근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하륜은 다시 한양(漢陽)의 무악(毋岳)이 지리설에 맞는 길지(吉地)라고 추천하고 이곳으로 도읍을 옮길 것을 주장했으나, 실권자 정도전과 조준(趙浚) 등의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무악(毋岳)은 지금 서울의 신촌 일대를 말한다. 하륜은 끝까지 무악이 가장 좋은 명당이라고 주장했으나, 그를 지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려 인종(仁宗) 때에 묘청(妙淸)이 서경(西京, 평양)으로 천도할 것을 주장하다가 김부식(金富軾) 등 유학자들의 반대로 좌절된 것과 같았다. 중 묘청은 마침내 반란을 일으켰으나 당시의 하륜은 그러한 힘도 없었다. 아마 이러한 좌절이 그로 하여금 정안대군(靖安大君) 이방원(李芳遠)에게 접근하게 만들었던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이방원 만남 간청한 하륜
하륜과 이방원의 만남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하륜은 사람의 관상을 잘 보았기 때문에, 처음에 이방원을 보고서 장차 크게 될 인물인 것을 알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방원의 장인 민제(閔霽)를 만나서 간청하기를 『내가 사람의 관상을 많이 보았으나 공의 둘째 사위만한 인물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한번 그를 만나보기를 원합니다』고 했다. 민제는 사위 이방원에게 권유하기를 『하륜이라는 사람이 대군을 꼭 한번 뵙고자 하니, 한번 그를 만나보도록 하시오』라고 했다. 이리하여 이방원과 하륜의 만남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러한 일화가 사실이라면 이것은 하륜이 이방원을 만나보기 위해서 꾸며낸 계략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당시 여러 왕자 가운데 가장 야망이 크고, 머리가 뛰어났던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리라는 것은 누구나 예측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도전과 하륜은 이렇듯 출세의 기회를 포착하는 데 누구보다 적극적이었다. 또 두 사람에게는 남들보다 뛰어난 아이디어도 있었다.
만약 하륜의 지모(智謀)가 없었더라면 이방원은 왕위에 오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하륜은 두 차례 왕자의 난을 실질적으로 계획하고 지휘한 인물이다.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서 정도전과 남은 일당을 불의에 습격하여 죽이고, 세자 이방번과 이방석을 제거했다. 또 제2차 왕자의 난에서도 박포(朴苞) 일당을 죽이고, 회안대군(懷安大君) 이방간(李芳幹) 부자를 유배시켰다. 이방원을 왕위에 올리기 위한 준비 작업이 그의 손에 의하여 추진되었던 것이다.
옛날부터 전해 오는 속설(俗說)에도 하륜은 살꽂이(箭串) 다리에서 태종 이방원의 목숨을 구했다고 한다. 제1, 2차 왕자의 난 이후 함흥에 가서 머물던 태조 이성계가 무학(無學) 대사 등의 간곡한 건의에 따라 서울로 돌아오던 날 일어났던 사건이었다. 태종 이방원은 살꽂이 다리까지 마중을 나가서 부왕을 맞이했다. 이때 하륜이 태종에게 건의하기를 『태상왕(太上王, 태조 이성계)의 노기가 아직 풀리지 아니했을 터이니, 막사 차일(遮日, 천막)의 중간 지주(支柱)를 아주 굵은 나무로 만들도록 하소서』라고 했다.
태종 이방원은 하륜의 말대로 아름드리 큰 나무로 차일 지주를 세웠다. 태조 이성계가 아들 태종을 보자마자 노기충천하여 활을 잡고 마중 나오는 아들을 향하여 화살을 쏘았다. 태종은 황급히 차일의 지주 뒤로 몸을 피하여 그 위기를 넘기고, 날아온 화살은 차일의 지주에 꽂혔다. 이것을 본 태조는 크게 웃으면서 『모두가 하늘의 뜻이다』 하고 단념했다. 지금 남아 있는 「살꽂이」라는 이름은 바로 여기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정몽주와 절친했던 정도전
고려 말에 태어난 정몽주(1337∼1392년) 정도전(1342∼1398년) 하륜(1347∼1416년) 세 사람의 출생연도를 보면 나이가 각기 5년씩 차이가 난다. 이색의 문하에서 공부할 때에 정도전보다 5년 선배였던 정몽주는 정도전을 항상 동생처럼 이끌어 주고, 성리학의 심오한 세계를 깨우쳐 주었다.
하륜도 이색의 문생(門生)이었는데, 정몽주와는 10년의 나이 차이가 있었으므로 정몽주를 무척 어려워했다. 하륜은 원래 정도전과는 친숙하지 않았던 것 같고 오히려 권근(1352∼1409년)과 가까이 지냈는데, 하륜은 권근보다 나이가 다섯 살 위였다. 정몽주가 1392년에 비명에 죽고 조선왕조가 개국되자 정도전의 전성시대가 열리게 되었으며, 1398년에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 정도전이 비명횡사하자 하륜의 전성시대가 오게 되었다.
정도전은 자가 종지(宗之)이고 본관이 경상도 봉화(奉化)인데, 아버지 정운경(鄭云敬)과 어머니 우씨(禹氏) 사이에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출생연도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으나, 태조 5년(1396년)에 그의 나이 55세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출생연도는 1342년이 틀림없다. 당시 본가는 영주(榮州)에 있었지만 그는 외가가 있던 단양(丹陽) 삼봉(三峰)에서 태어났다. 그러므로 그의 호가 삼봉이 됐으며, 그의 유저로서 『삼봉집(三峰集)』이 남아 있다.
그의 아버지 정운경은 고려 말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3품의 형부상서·밀직제학(密直提學) 등의 벼슬을 지냈다. 정운경은 이색의 아버지 이곡(李穀)과 가까운 사이였으므로, 정도전은 어려서부터 유명한 유학자 이색의 문하에 들어가서 성리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그 문하의 젊은 유학자들과 교우할 수가 있었다.
정도전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머리가 명석했다고 한다. 이색의 문하에서 정몽주 이숭인(李崇仁) 이존오(李存吾) 김구용(金九容) 김제안(金齊顔) 박의중(朴宜中) 윤소종(尹紹宗) 등과 친구가 되어 쉬지 않고 유학을 공부하여 높은 학식을 쌓아나갔다.
당시 이색의 문하에서 정도전의 위치를 보면 경학에서는 정몽주 권근 등과 비길 만큼 심오한 경지에 도달했으며, 문장에서는 이숭인 등과 앞뒤를 다툴 만큼 내용이 호방하고 글이 유려했다. 당시 사람들은 그의 문장이 제일이라고 추켜올리기를 주저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숭인과의 경쟁의식이 조선왕조가 건국된 뒤에 그를 참혹하게 죽이는 원인이 되었다고도 한다.
1362년(공민왕 11년) 10월, 약관 21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1363년(공민왕 12년)에 충주사록(忠州司錄)에 임명되고, 1364년(공민왕 13년)에 전교주부(典校主簿)에 제수되고, 1365년(공민왕 14년)에 통례문(通禮門) 지후(祗侯)에 전보되었다. 그의 나이 25세가 되던 1366년(공민왕 15년)에 부친상과 모친상을 연달아 당하여 고향 영주에 내려가서 3년 동안 여묘(廬墓)살이를 하면서 부모의 무덤을 지켰다.
그 후 그의 나이 29세가 되던 1370년(공민왕 19년) 여름에 성균관(成均館) 박사(博士)에 임명되어 비로소 마음에 맞는 벼슬을 얻게 되었다. 그때 이색이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을 겸임하고, 김구용, 정몽주, 박상충(朴尙衷), 박의중, 이숭인 등이 교관(敎官)을 맡았는데, 이들이 정도전을 추천하여 박사에 선임되었다고 한다. 정도전은 매일 명륜당(明倫堂)에 나가 앉아서 유생(儒生)들에게 경서를 강의하고 토론하여 배우는 사람들로 하여금 성리학의 심오한 원리를 스스로 깨닫게 했다. 이때부터 고려의 성리학이 비로소 크게 발전하게 됐다고 한다.
정도전과 정몽주의 절친한 교우관계를 나타내는 일화가 하나 있다. 정몽주가 정도전에게 『맹자(孟子)』 한권을 선물로 주었는데, 정도전은 매일 그 『맹자』를 한 장 씩, 혹은 반장씩 읽고 철저히 연구하여 깊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평상시에 정도전은 정몽주를 존경하고 그의 학풍을 추종했다. 후일 정몽주가 죽은 후에, 정도전은 그의 유학 체계를 조선왕조에 계승시키려고 노력했으며, 가끔씩 자기만이 정몽주의 심오한 유학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려 말의 혼란기에 나라와 백성을 구원하는 방법을 둘러싸고 서로 의견을 달리하면서 정도전과 정몽주의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정몽주는 유학의 보수파로서 정통 본류를 형성하여 고려왕조를 지키려고 애썼고, 정도전은 유학의 좌파로서 개혁을 추진하여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고 노력했다.
또 정도전의 혈통 문제를 시비하는 과정에 우현보(禹玄寶)와 이숭인, 김진양 등과도 사이가 극도로 나빠졌다. 당시 이색의 문하에서 수학하던 젊은 유학자들은 대개 고려 말엽 권문세가의 자제들이었다. 그러나 정도전은 그의 어머니 우씨(禹氏)가 우현보의 집안이었는데 그 혈통에 천인의 피가 섞였다는 사실을 우현보의 세 아들 우홍수(禹洪壽) 등이 세상에 퍼뜨렸다. 집안 혈통이 미천하다고 하여 정도전은 동문수학하던 젊은 유학자들로부터 멸시와 냉대를 받았다. 정도전이 새로운 관직에 임명될 때마다 사헌부의 관리들은 임명장에 서경(署經, 서명)하기를 거부하고 정도전을 괴롭혔다. 이러한 시비로 말미암아 정도전은 이색 문하의 다정했던 친구들과도 거리가 멀어졌다. 그 결과 고민을 거듭하던 정도전은 신흥 군벌인 이성계의 군영을 찾아가서 그의 막료로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되었던 것이다.
친명(親明) 주장하다 유배 당해
고려 말에 정도전의 일관된 주장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친명정책(親明政策)을 고수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우왕과 창왕의 왕위계승을 반대하는 것이었다.
이색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한 젊은 유학자들은 몽고의 원(元)나라를 배척하고 중국의 명(明)나라와 가까이 하는 공민왕(恭愍王)의 배원정책과 친명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공민왕이 죽고 난 다음 정권을 잡은 이인임 경복흥(慶復興) 등이 친원정책을 취하자 정몽주를 비롯한 젊은 신진 유학자들은 이에 반대했다. 1375년(우왕 1년)에 몽고 본토로 쫓겨 간 북원(北元)의 사신을 맞아들이는 문제로 인하여 정도전은 배원정책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다가 친원파 이인임 등의 미움을 사서 전라도 나주군 회진현(會津縣) 거평부곡(居平部曲)으로 귀양 갔다.
이때 정도전의 나이 34세였다. 그는 이곳에서 3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는데, 소박한 농민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농촌의 비참한 생활을 체험했다. 거평의 사람들은 매일같이 술과 음식을 가지고 와서 정도전을 위로했고, 그가 거처할 초가를 짓는 일도 도와주었다. 정도전은 그 농민들의 온정에 감격했을 뿐만 아니라, 뜻밖에도 농민들이 유식한 데 놀랐다고 회고했다.
그가 36세 되던 1377년(우왕 3년)에 귀양지가 고향땅으로 옮겨져서 영주와 단양의 삼봉 사이를 오가면서 4년의 세월을 보냈다. 그 뒤에 거주지 제한이 풀려서 서울 삼각산 아래 초가를 짓고 「삼봉재(三峰齎)」라고 이름하고 제자들을 가르쳤고, 또 다시 부평의 남촌(南村)으로 거처를 옮겨 후학을 가르쳤다. 이처럼 정도전은 친명정책을 주장하다가 친원파의 미움을 사서 9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면서 30대를 보내고 40대를 맞았다.
1388년(우왕 14년)에 위화도 회군에 성공하여 이성계 일파가 우왕을 축출하고 최영 등의 친원파를 숙청하게 되자 정도전은 대사성(大司成)에 임명되었다. 위화도 회군에는 정도전이 직접 관여한 것 같지는 않다.
우왕을 몰아내고 창왕을 세울 때에 정도전과 윤소종은 창왕을 세우는 것을 반대하고, 왕씨 중에서 다른 사람을 골라서 왕으로 세울 것을 주장했다. 그들이 신돈의 피를 받았고, 고려 왕씨의 혈통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위화도 회군 때에 좌군 도통사(左軍都統使)로서 이성계에게 협력한 조민수(曺敏修)가 창왕을 세울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이리하여 당시 명망이 높은 대유학자 이색에게 그 의견을 물었는데, 이색은 그의 제자 정도전과 윤소종의 주장을 묵살하고 『마땅히 전왕의 아들을 세워야 한다』고 판정했다. 목은(牧隱) 이색 같은 사람이 『우왕 창왕이 공민왕의 후손이다』라고 단정한 것을 보면 정도전과 윤소종이 『그들은 왕씨가 아니고 신씨이다』라고 주장한 것은 날조된 논리임에 틀림없다.
고려말 위기 모면한 정도전
그러나 1388년(창왕 1년) 11월에 정도전의 주장에 의하여 이성계 심덕부(沈德符) 지용기(池湧奇) 정몽주 등이 흥국사(興國寺)에 모여서 의논하기를 『우왕과 창왕은 왕씨가 아니므로 마땅히 가짜 왕씨를 폐지하고 진짜 왕씨를 임금으로 세워야 한다』 하고 창왕을 강화도로 추방하고 공양왕(恭讓王)을 맞아들였다. 이리하여 정도전의 계획대로 고려의 왕실이 혈통문제로 말미암아 점차 권위를 잃어가고, 그 대신 새로운 왕조의 창업을 가져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정도전의 주장은 나중에 『고려사』(高麗史)를 편찬할 때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이씨왕조 건국을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우왕과 창왕을 신씨(辛氏)로 몰아붙여서 세가(世家)의 고려 제왕(諸王)에서 제외하여 열전(列傳)에 편입했던 것이다.
1392년(공양왕 4년) 3월에 이성계가 해주(海州)에서 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떨어져서 중상을 입었다. 이성계가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정몽주, 김진양(金震陽) 등 유학자들은 『이성계가 지금 말에서 떨어져 위독하니 마땅히 먼저 그 오른팔인 조준과 정도전 등을 제거한 다음이라야 이성계 제거를 도모할 수가 있다』 하고, 대사헌 강회백(姜淮伯) 등에게 정도전 등을 처형하도록 상소하게 했다.
간관(諫官) 김진양도 공양왕에게 아뢰기를 『옛날 사람들이 말하기를 「풀을 뽑을 때에는 뿌리까지 뽑지 않으면 결국 다시 싹이 나오며, 악(惡)을 없앨 때에는 그 근본을 없애지 않으면 그 악은 더 자란다」고 했습니다. 조준과 정도전은 악의 뿌리이고, 남은과 윤소종 등은 악의 뿌리를 북돋워서 덩굴로 자라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라면서, 정도전 남은 조준 윤소종 등을 처형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나 공양왕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먼저 남은 등을 심문한 다음에 조준과 정도전이 관련이 있으면 그때에 가서 그들을 아울러 심문하는 것이 좋겠다고 대답했다. 이리하여 정도전은 위기를 모면하여 보주(예천)에 귀양 가는 데에 그쳤다. 정몽주 등이 이성계 일파를 제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친 셈이다. 그 직후 정몽주는 이방원 일파에 의해 선죽교(善竹橋)에서 해 당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1392년 7월에 정도전 남은 조준 등이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마침내 조선왕조를 건국하게 되었다. 이때에 그의 나이가 51세였다. 정도전은 1등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서 봉화백(奉化伯)에 봉해졌다. 그는 개국공신 중 태조 이성계로부터 가장 높은 신임을 받았던 사람으로서, 문하시랑 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도평의사사 판사(都評議使司 判事) 호조(戶曹)판사 등의 문관직과 의흥친군위 절제사(義興親軍衛 節制使)와 같은 무관직을 아울러 맡아서 실권을 잡았다.
조선 도읍 정한 정도전
1394년(태조 3년) 10월에 서울을 한양으로 옮길 때에 정도전은 하륜의 주장을 물리치고 도성이 들어설 자리를 오늘날 서울의 4대문 안으로 정했다. 그 다음해 10월에 새 서울 한양의 궁궐과 종묘가 완성되자, 정도전이 새로 지은 궁전과 누각 이름을 붙였다. 오늘날도 사용되는 경복궁(景福宮) 사정전(思政殿) 근정전(勤政殿) 등의 이름은 그 당시에 정도전이 지은 것이다.
또 도성(都城)이 완성되자 동서남북의 크고 작은 성문 이름도 모두 정도전이 지었는데, 남대문은 숭례문(崇禮門), 동대문은 흥인문(興仁門), 서대문은 돈의문(敦義門), 북대문은 숙청문(肅淸門)이라고 했다. 그뿐만 아니라 도성 안 5부(部) 49방(坊)의 이름도 모두 그가 지었다. 이처럼 조선왕조 창업 당시에 크고 작은 일들은 모두 정도전의 손을 거쳐 이루어졌다.
1393년(태조 2년) 7월에 정도전은 동북면 도안무사(東北面都安撫使)가 되어 동북면(함경도) 일대에 살던 토착 여진족을 조선의 편호(編戶)로 편입시켜 우리 백성으로 동화시켰으며, 1397년(태조 6년) 12월에 동북면 도선무사(東北面都宣撫使)로 나가서 동북 지방의 성보(城堡)를 수축하고 주군(州郡)의 경계를 정했다.
고려 때에는 여진족이 동북면 일대에 내려와서 농경생활을 했다. 이성계는 함주(함흥)의 대토호로서 그 세력이 동북면 일대 여러 여진족을 통솔할 만큼 막강했다. 이성계는 길주(吉州) 출신인 여진족 대토호 이지란(李之蘭, 퉁두란)과 손을 잡고 동북면 일대 여러 여진족이 조선의 판도 안에 들어오게 했다. 이리하여 조선이 건국하자 정도전을 도안무사로 보내 토착 여진족을 조선의 호적에 올리고, 그들에게 농토를 주어 농사를 짓도록 생존권을 보장해 주었으며 우리나라 백성들과 여진족의 혼인을 장려했다.
4년 뒤에 정도전은 다시 도선무사로 나가서 동북면의 주(州) 군(郡) 현(縣)의 구획을 정하고 성(城)과 보(堡)를 쌓아 함경도 일대의 땅을 우리나라의 국토로 완전히 편입하는 작업을 했다. 후일 세종시대에 김종서(金宗瑞)가 개척한 6진(鎭)의 땅은 수복하지 못한 두만강 하류 일부 지역이었던 것이다.
1396년(태조 5년)부터 1398년(태조 7년) 정도전이 죽을 때까지 중국의 명(明)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조선에서 보낸 외교 문서를 트집삼아 정도전을 중국으로 압송하라고 강요했다. 이리하여 정도전의 입지가 정부 안에서 아주 어려워졌고, 이 틈을 타서 정적들은 그를 제거할 기회를 노리게 되었다.
일찍이 정도전은 사신으로 명나라에 세 번이나 갔다 온 적이 있었다. 1384년(우왕 10년) 여름에 정몽주가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갈 적에 정도전은 서장관(書狀官)으로 수행했는데, 당시 명나라 수도였던 남경(南京)에서 명 태조를 만나 우왕의 왕위 계승을 허락받고 공민왕의 시호를 받았다.
제1차 왕자의 난
1390년(공양왕 2년) 6월에 정도전은 「정당문학」으로서 성절사가 되어 명 태조를 만나서, 윤이(尹彛)·이초(李初)가 이성계를 명나라에 고발한 사건을 변명했다. 정도전은 명 태조에게 황제의 사신을 조선에 보내 이 사실을 직접 조사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때는 위화도 회군 직후였으므로 명 태조는 요동 정벌군을 돌이킨 이성계를 두둔했고 주원장은 정도전을 위로하기를 『윤이와 이초가 그대 나라의 국사를 어지럽히려고 하는 것을 알고 짐은 처음부터 그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벌써 그들의 죄를 다스렸으니 그대 나라에서 다시 무엇을 근심하겠는가?』라고 했다. 이리하여 윤이 ·이초의 무고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또 조선이 건국한 직후인 1392년(태조 1년) 겨울에 정도전은 하정사(賀正使)로서 명나라에 가서 명 태조를 만나 하례를 드렸다. 이처럼 명 태조는 정도전을 여러 번 만난 적이 있었으므로 정도전의 사람됨을 알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면 1396년에 명 태조 주원장이 조선에서 보낸 외교문서를 트집 잡아 그 문서를 작성한 자로 정도전을 지목하여 명나라로 압송하도록 강요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첫째는 여진족의 송환 문제 등 양국의 다섯 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조선이 명나라의 요구에 따르지 않고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며, 둘째는 조선왕조의 실권자인 정도전을 강제로 압송하여 그를 볼모로 잡아두고 조선을 협박하려는 야비한 생각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중국으로 오가던 외교문서는 황제에게 보내는 표문(表文)과 황태자에게 보내는 전문(箋文)의 두 종류가 있었는데 그 표전문에 명나라를 모욕하는 내용과 경박한 문투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역사적으로 「표전문 사건」이라고 부른다.
실제 문제의 표문을 지은 사람은 정탁(鄭擢)이었고, 교정한 사람은 정총(鄭摠)과 권근이었다. 그러므로 정도전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으나 명나라에서는 정도전을 「화(禍)의 근원」이라고까지 몰아붙이면서 중국으로 송환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이처럼 명 태조의 무리한 압력을 받은 태조 이성계는 『그가 나를 어린아이로 아는가?』 하고 크게 화를 냈다.
조선에서는 이러한 치욕을 참다못하여 명나라의 요동(遼東)을 정벌할 계획을 추진하게 되었다. 정도전은 진도(陣圖)를 만들어 지휘관과 각 도의 군사를 훈련시키고 지방의 성보(城堡)를 축성하고 군량미를 저축했다. 그러나 요동을 정벌하는 것은 사실상 무리한 일이었다. 일찍이 최영의 요동 출병에 반대하여 위화도 회군을 감행한 태조 이성계가 아니었던가. 그가 다시 요동을 정벌한다는 것은 조선왕조에 반대하던 절의파(節義派)를 설득하기에는 명분이 약했다. 항상 정도전의 독주에 반감을 가졌던 조준은 『새로 창업한 나라로서 명분이 없는 군사를 가볍게 일으키는 것은 매우 옳지 않습니다』라며 반대했다. 이리하여 요동을 정벌하는 계획은 일단 중지되었다.
1397년(태조 6년)에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정총 김약항(金若恒) 노인도(盧仁度) 세 사람이 명 태조의 노여움을 사서 명나라에서 형벌을 받고 무참하게 죽은 사건까지 일어났다. 그해 3월에 예문관 학사 권근 등이 자진해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자기가 표전문을 지은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표전문 내용을 해명하는 한편, 여러 편의 시를 지어 명 태조의 환심을 사고 중국에 문명(文名)을 크게 떨치기도 했다. 그러나 양국 사이에 정도전의 송환 여부는 표전문 사건을 해결하는 중대한 문제로 남게 되었다. 정도전 반대파인 이방원 일파는 표전문 사건으로 양국 관계가 악화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정도전은 개국 후 태조의 두 번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씨 소생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는 문제에 관여하였다. 태조에게는 두 명의 부인이 있었다. 첫째는 신의왕후 한씨이고, 둘째가 신덕왕후 강씨였다. 신의왕후 소생 아들로는 방우∙방과(정종)∙방의∙방간∙방원(태종)∙방연 등이 있었다. 이들은 신덕왕후 소생의 아들보다도 아버지 태조가 왕위에 오르는 데 공도 많았다. 그런데 정도전이 이를 다 무시하고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게 하였던 것이었다.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살해함으로써 조선 건국이 가속화되는 계기를 만들었던 이방원 등 첫째 부인 한씨 소생들의 불만이 커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더구나 사병 혁파 문제로 서로 갈등을 보이던 중 1398년(태조 7년) 제1차 왕자의 난이 발생하였고, 정도전은 이방원이 이끄는 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정도전은 조선조 내내 신원 되지 않다가 고종 때 관직이 회복되었다. 고종 때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건국 초에 설계 등에 참여한 정도전의 공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제1차 왕자의 난 발생 원인은 개인적인 불만이 표출된 것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방원과 정도전이 가지고 있던 정치적 이상의 차이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즉 국가체제를 어떻게 편제하고 운영할 것인가의 차이인 것이다. 정도전이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꾀하는 이상적인 왕도정치를 표방하였다면, 이방원은 그와는 달리 강력한 왕권에 바탕을 둔 왕조국가를 지향했기 때문이었다. 이상과 현실의 갈등에서 현실이 우세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사림들이 집권하게 되면서 정도전이 꿈꾸던 이상세계가 구현되어 갔으니, 정도전의 꿈은 꿈에서 그친 것이 아니리라….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고려에서 조선으로 교체되는 격동의 시기에 역사의 중심에서 새 왕조를 설계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꿈꾸던 성리학적 이상세계의 실현을 보지 못하고 끝내는 정적의 칼에 단죄되어 조선 왕조의 끝자락에 가서야 겨우 신원 되는 극단적인 삶을 살았다.
1. 정도전의 업적 : 충주사록(忠州司錄)을 거쳐 전교시주부(典敎寺主簿)·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를 지내고 부모상으로 사직하였습니다. 1370년 성균박사가 되고 이어 태상박사(太常博士)를 거쳐 예조정랑 겸 성균태상박사(禮曹正郞兼成均太常博士)가 되어 전선(銓選)을 관장하였습니다. 1375년(우왕 1) 성균사예(成均司藝)·지제교(知製敎) 등을 역임하였고 이해 권신 (이인임(李仁任)·(경복흥(慶復興) 등의 친원배명(親元排明)정책을 반대하다가 회진현(會津縣, 현 전남 나주)에 유배되었습니다.
1377년 유형을 마치고 고향 영주(榮州)에서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 종사하며, 특히 주자학적 입장에서 불교배척론을 체계화하였습니다. 1383년 동북면도지휘사(都指揮使) 이성계(李成桂)의 막료가 되었습니다. 1384년 성절사(聖節使) 정몽주(鄭夢周)가 명나라로 가게되자 그의 추천으로 서장관이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오면서 다시 정계에 복귀하였습니다. 1385년 성균좨주(成均祭酒), 이듬해 남양부사(南陽府使)로 있다가 1388년 이성계의 천거로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에 승진하였습니다.
이성계의 우익으로서 조준(趙浚)과 함께 전제개혁론을 주장, 1389년(창왕 1)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승진하였고 창왕(昌王)을 폐위하고 공양왕(恭讓王)을 옹립하는데 적극 가담하여 봉화현충의군(奉化縣忠義君)에 책록되었습니다. 1390년(공양왕 2) 경연지사(經延知事)로 성절사 겸 변무사(聖節使兼辨誣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동판도평의사사사 겸 성균대사성(同判都評議使司事兼成均大司成)·삼사부사(三司副使)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그 해 조민수(曺敏修) 등 구세력을 몰아내고 전제개혁을 단행하여 과전법(科田法)을 실시하게 함으로써 조선 개국의 정치·경제적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이듬해 이성계가 군사권을 장악하여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를 설치하자 우군총제사(右軍摠制使)가 되고 이어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재직 중, 구세력의 역습으로 탄핵을 받아 관직을 박탈당하고 봉화로 유배되었습니다. 1392년 한때 풀렸으나 정몽주의 탄핵으로 투옥되었고 정몽주가 살해된 뒤 풀려나와 조준·남은(南誾) 등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 조선 건국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그 공으로 분의좌명개국공신(奮義佐命開國功臣) 1등에 녹훈되고,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예문춘추관사(藝文春秋館事)에 임명되어 사은 겸 정조사(謝恩兼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습니다. 1394년(태조 3) 한양천도 때는 궁궐과 종묘의 위치 및 도성의 기지를 결정하고 궁·문의 모든 칭호를 정했습니다. 조선경국(朝鮮經國典)을 찬진하여 법제의 기본을 이룩하게 하고 1395년 정총(鄭摠) 등과 고려국사(高麗國史) 37권을 찬진했으며, 지방행정 방법을 기술한 감사요약을 만들었습니다. 1397년 동북면도선무순찰사(都宣撫巡察使)가 되어 성을 수축하고 역참(驛站)을 신설했습니다. 그러나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李芳遠)에게 참수되었습니다.
유학(儒學)의 대가로 개국 후 군사·외교·행정·역사 등 여러 방면에서 활약하였고, 척불숭유(斥佛崇儒)를 국시로 삼게 하여 유학의 발전에 공헌하였습니다
2. 정도전의 성장과정 : 정도전의 본관은 봉화(奉化)이며 자 는 종지(宗之)이고 호는 삼봉(三峰)입니다. 1342년 고려 충혜왕 3년 경상북도 영주에서 밀직제학 형부상서를 지낸 정운경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장성하여 목은 이색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습니다. 당시 동문으로 정몽주, 윤소종, 박의중 이숭인 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1362년(공민왕 11) 진사시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올랐습니다.
정도전은 고려말 조선초의 정치가이자 학자로 1392년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 건국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1394년 조선경국전을 집필, 편찬하여 조선 법제의 근본을 이루었습니다. 또한, 군사, 외교, 행정, 역사, 성리학등 여러 방면에서 활약했습니다. 그러나 제 1차 왕자의 난때 강력한 왕권을 다지고자 했던 태조 이방원에 의해 참수되었습니다.
그가 잠들어있는 사당을 마주하노라니 얼마 전에 읽었던 소설 속 한 구절이 떠 올랐습니다.
“경국전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국가 백년대계의 기틀을 다지는 원대한 책략입니다. 이를 반대하는 것은 소인배들입니다.”
" 신은 조선을 경영하려고 하였습니다. 신이 조선을 경영하고 전하께서는 신을 경영하시는 것이 이 정도전의 꿈입니다.”
하지만 그 꿈은 그와는 다른 또 다른 세상을 꿈꾸었던 왕의 아들에 의해 한 순간에 사라져갔었습니다.
조선경국전은 조선왕조의 헌법이라 할 수 있는 책으로서 개국 초 정도전이 지은 책입니다. 이는 삼봉집(권 7, 8)에도 수록, 천지자연의 이치에 따라 생명을 아끼는 마음, 인을 바탕으로 백성을 사랑하는 민본정치를 실현하여 유교적 이상 국가를 만들자는 것으로 성종 때 편찬한 경국대전의 모체가 되었습니다.
또 한권의 책 불씨잡변은 고려의 멸망과 함께 불교가 타락하고 새로 유교가 대두될 때로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의 계기가 되었던 책으로 성리학을 기본으로 하는 민본국가를 세우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경제문감은 조선왕조의 정치조직에 대한 초안으로 조선시대의 정치체제는 감사와 수령의 통할권을 재상이 장악하는 재상 중심의 중앙집권체제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책 또한, 삼봉집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정도전은 고려 말기의 신진 사대부 출신으로서 성리학적 관점에서 불교 배척론을 체계화하였다.
이성계의 오른팔로서 조준과 함께 전제 개혁론을 주장하였다.
1390년에 조민수 등 구세력을 몰아내고 전제 개혁을 단행하여 과전법을 실시하게 함으로써 조선 개국의 정치, 경제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이후 조준 남은 등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 조선건국의 주역이 되었다.
그는 재상 중심의 정치를 추구하였으나 제 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 의해 제거되었다
*이방원 - 조선 제3대 왕 (제위 1400~ 1418) 태조의 5남으로, 어머니는 신의 왕후 한씨. 비는 민제의 딸 원경 왕후.
태조가 방원의 이복동생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1398년 에 정도전 남은 등을 살해하고 이어 강씨 소생의 방석 방번을 귀양 보내기로 하고 도중에 죽었다.
이것을 제 1차 왕자의 난이라 하며 방원은 이 때 세자로 추대되었으나 둘째 형인 방과에게 사양하였다.
제 2차 왕자의 난이 평정된 후 정종의 양위를 받아 조선 제 3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즉위하자 사병을 없애고 의정부를 설치하였다 .
1405년 1월에는 의정부의 업무를 6조 에서 나누어 맡게 하는 등 관제 개혁을 통해 왕권의 강화를 도모하였다
정도전과 이방원에 관하여
정도전은 조선 왕조 수립의 일등 공신으로서 다른 개국공신들과 함께 막강한 권력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유교에 뿌리를 둔 왕도 정치를 이상으로 갖고 있었습니다. 왕도 정치는 중국의 고대 성왕들인 요, 순, 우임금, 주나라 문왕, 무왕의 정치를 재현하는 것으로서, 왕이 덕을 근본으로 백성을 다스려야 한다는 이상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상은 왕권이 여러 부족들 사이에서 권한을 조정하는 위치를 넘을 수 없기 때문에 그다지 강하지 않았던 고대의 시대 조건을 반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이상이 조선 왕조에 적용된다면 자연히 왕권은 상당히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들의 이러한 이상은 자신들의 현실적 이해와도 맞아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왕권이 제약을 받을수록 이들의 권한은 상대적으로 커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 개국공신들은 최고 정부 기관인 도평의사사를 중심으로 실권을 휘둘렀습니다. 이들은 왕권을 도평의사사의 결의를 재가하는 권한만으로 제한하고자 했습니다. 이들이 이러한 의도를 내비치자 왕실과 충돌을 빚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고려 왕조의 무능과 부패에 대한 대안으로서 새로이 들어선 조선 왕조는 더욱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를 이룩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는 곧 강력한 왕권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명분이 약한 역성혁명을 거쳐 새로운 왕조를 세운 조선 왕조의 처지에서 왕권의 약화는 곧바로 왕조의 위기로 직결될 수도 있는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그런데도 개국공신들이 왕권을 제약하려고 하니 자연히 강력한 왕권을 필요로 했던 조선 왕조의 시대적 요구와 갈등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왕권을 제약하려는 개국공신들의 구심점은 정도전이었습니다.
조선 왕조의 초대 임금인 이성계는 개국공신들이 왕권을 제약하려고 할 때 이미 늙었고, 자신을 왕으로 옹립해 준 개국공신들과 싸우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조선 왕조를 세우는 과정에서 계속되었던 권력 투쟁은 이성계보다는 오히려 그의 아들인 이방원이 도맡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은 강경 개혁파와 온건 개혁파의 투쟁에서 정몽주를 회유하다가 잔인하게 제거한 일로도 알 수 있듯이 현실 정치의 권모술수와 정치적 계산에 밝은 사람이었습니다. 조선 왕조를 세우기 위한 정변에서는 이성계의 지도력과 결단이 성공의 원동력이었다면, 새로운 왕조로 바꾸기 위해 걸림돌을 없애고 그 토대를 닦는 과정에서는 이방원의 정치력이 거의 절대적인 원동력이었습니다.
그러한 이방원이 왕권을 제약하려고 하는 개국공신들을 호락호락 보아 넘길 리는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이방원과, 왕권을 제약하고자 하는 정도전 사이의 한판 승부는 필연적이었습니다.
한편 이방원이 정도전을 제거한 것은 대외 관계에 대한 견해 차이도 한 계기로 작용하였습니다. 위화도 회군으로 권력을 움켜 쥔 사대부 정권은 명나라에 친선 정책을 펴왔습니다. 이러한 대외 정책은 조선 왕조를 세운 뒤에도 한동안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동 공격 뒤로 잠잠하던 명나라가 조선 건국 뒤부터 다시 압력을 넣어오기 시작하면서 조선 정부 안에서는 명나라에 대한 태도를 둘러싸고 논쟁이 붙었습니다. 정도전을 비롯한 개국공신 일부는 명나라에 대해 강경책을 쓸 것을 주장했습니다.
위화도 회군을 적극 옹호했던 이들이 명나라에 대한 강경책을 주장하는 것을 보면 대외 관계를 바라보는 이들의 태도가 고정 불변의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이 강경책을 주장하는 근거는, 새로운 왕조의 기틀도 잡혔으므로 명나라와 힘으로 맞설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맞서 이방원은 왕권이 안정적으로 뿌리내리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명나라를 자극하는 것은 결코 현명하지 않다고 주장했습니다. 정도전이 내부 문제에서나 대외 문제에서나 모두 다분히 이상주의적 노선을 가졌다면 이방원은 현실주의적인 노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두 사람의 이해 관계와도 관련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정도전은 도평의사사를 중심으로 개국공신들이 힘을 잡았으므로 왕조의 기틀이 잡히지 않았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두 사람 사이의 논쟁이 격화하자 이방원은 그렇지 않아도 왕권 강화에 걸림돌이 되는 정도전을 제거하기로 결심을 굳혔습니다.
태조 이성계는 개국할 때 이방원의 공로가 다른 왕자들보다 뛰어났다며 특별히 대대로 전해온 동북면 가별치 5백여 호(戶)를 내려 준 적이 있었습니다. 가별치는 일종의 사병(私兵)입니다. 이방원은 자신의 사병들을 꾸준히 키웠습니다. 왕자들의 사병들을 해산시킬 때도 이방원은 형식적으로만 해산시킬 뿐이었습니다. 그의 권력 의지는 강경 개혁파 사대부들 내부의 권력 투쟁이 불가피함을 일찍부터 예감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1398년에 사병들을 동원하고 자신을 추종하는 군부의 일부 세력을 동원해 정도전을 비롯한 왕권을 제약하려는 개국공신들을 제거하여 도평의사사를 무력화시켰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세자 방석과 그 형인 방번을 죽임으로써 실권을 완전히 손에 넣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정변은 개국공신에 대한 공격임과 동시에 왕권의 강화를 위해 개국공신들과 싸우지 않고 이를 꺼리며 주저하던 아버지 태조 이성계에 대한 압력이기도 했습니다.
이방원이 정도전을 비롯한 개국공신들을 숙청하고 실권을 장악하자 이성계는 왕위를 아들인 정종에게 물려주고 함흥으로 낙향했습니다. 정도전 일파에 대한 숙청은 이성계까지 물러나게 만드는 결과를 빚었습니다. 이성계에게는 이방원의 정변으로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게 되어 버린 자신이 왕위에 계속 눌러앉아 있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했던 것입니다. 이성계가 낙향한 뒤 2년이 지난 1400년 이방원은 형 정종을 물러나게 하고 자신이 왕위에 앉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방원은 조선 왕조 3대 임금인 태종이 되었습니다.
요컨대 정도전과 이방원의 투쟁을 핵심 내용으로 하는 이른바 1차 왕자의 난은, 이상주의적 노선을 걷는 개국공신들과 현실주의적 노선을 가진 이방원 사이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방원이 가진 현실주의적인 노선은 안으로는 왕권을 강화하고, 밖으로는 명나라에 대한 유화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노선은 태종 뒤로 거의 100년 동안 조선 왕조에서 계속 지켜졌습니다. 조선의 외교 정책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대교린은 이와 같은 권력 투쟁을 거치면서 확립된 것이었습니다.
이방원이 정도전을 제거하는 과정을 볼 때, 이방원은 권력을 위해 같이 고생한 동지도 가차 없이 처단하는 것은 말할 나위 없고, 아버지와 형제들까지 희생양으로 삼는 냉혹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냉혹함은 조선 왕조를 튼튼한 정권으로 뿌리내리게 하는 데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고, 그러한 점에서 역사 발전에 이바지한 측면도 있습니다.
또한 이방원이 냉혹하다고 하여 그에게 패한 정도전이 인간적이었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는 둘 사이의 차이를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들 사이의 싸움의 기본 성격이 현실주의와 이상주의 노선 사이의 싸움이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봉건통치배의 추악한 권력 투쟁이라는 측면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들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갖가지 추악한 짓을 일삼은 것과 자신의 정치 노선을 위해 싸운 것을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로 인식하는 것이 올바른 역사 인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1398년(태조 7년)에 이방원에게 척살된 후 무려 467년간이나 '역모 죄'를 뒤집어써야 했다. 1865년(고종 2년)에야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궁궐의 설계자'란 점을 들어 그의 훈작(勳爵)을 회복시켰으나, 이미 그에게는 제사 지낼 후손도 없었고, 심지어 무덤조차 잃어버렸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정도전은 조선왕조를 창업했으나, 조선왕조는 그를 거의 500여 년간이나 어둠 속에 묻어두었다.
그러나 오늘날 정도전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성공한 혁명가'로, '탁월한 재상'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정도전 이름이 들어간 책만 얼추 헤아려도 20여 권이 넘을 정도이다. 도대체 왜 오늘날 사람들은 정도전에 관심을 갖는 것일까?
그의 드라마틱한 인생 역정 자체가 감동을 주지만, 그것만으론 설명이 부족하다. 사람들은 그에게서 이 시대 리더십의 방향을 찾는 것 같다. 그 방향은 '백성이 나라의 뿌리'라는 민본(民本) 사상으로 요약된다.
정도전에 의해 체계화된 민본사상은 조선왕조 500여 년 동안 왕과 신민들의 지배적인 정치담론으로 회자됐고, 지금도 우리 한국인들의 마음 깊숙이 깔려 있다. 세종대왕, 정약용, 그리고 개항기의 서재필에 이르기까지 조선조 정치가들의 저술 속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정치의 제1원리(principia)'도 민본이었다.
민본이라는 말은 원래 '민유방본(民惟邦本)', 즉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는 뜻으로, 사서삼경의 하나인 '서경'에서 나온 말이다. 즉 "백성을 가까이 생각해야 하며, 얕잡아봐서는 안된다(不可下). 백성이야말로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가 편안한 법이다. 내가 천하를 둘러보니 우부우부(愚夫愚婦)들도 모두가 나보다 훌륭한 사람들이었다(能勝予)"는 우(禹)임금의 말이 그것이다. 지도자는 흔히 백성들을 위한다는 '위민(爲民)'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것은 위에서 아래를 굽어보는 자세이다. 민본은 백성들의 나은 점을 '공경(敬)'하고 '두려워(畏)'해야 한다는 낮은 자세이다.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의 첫 페이지에서 "임금의 자리는 높기로 말하면 높고 귀하기로 말하면 귀한 것"이지만, "백성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크게 염려할 일이 생긴다"고 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층 백성들은 지극히 약하지만, 힘으로 위협할 수 없고, 지극히 어리석지만, 꾀로써 속일 수 없는 존재이다. (임금이) 그들의 마음을 얻으면 복종하게 되지만, 마음을 얻지 못하면 돌아서서 뒤집게 된다. 백성들이 복종하는 것과 뒤엎는 것 사이의 간격은 사실 털끝만큼의 차이도 나지 않는다."
백성을 근본으로 삼지 않는 정치는 어디고 설 데가 없다는 이 '경국(經國)의 조건'은 정도전이 설계한 궁궐의 구조를 봐도 알 수 있다. 성 밖에 깊은 해자(垓字)를 파고, 겹겹이 높은 성곽들로 둘러싼 일본 에도성이나 중국의 자금성과 달리, 경복궁이나 창덕궁은 쉽게 넘어갈 수 있는 낮은 담장으로 둘러쳐 있다.
신민의 지지를 얻지 못한 왕은 여차하면 제거될 수 있고, 백성이 나라의 참된 뿌리이기 때문에 상대가 비록 왕이나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언제나 잘못한 것을 꾸짖을 수 있다는 한국인의 강한 비판정신은 이러한 역사적 경험에 기인하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600년 전 정도전은 말했다. "천자가 관제를 만들고 봉록을 지급한 것은 신하를 위해서가 아니라 모두 백성을 위한 것이었다"라고. 지도자는 위에서 군림하는 사람이 아니라 백성을 위해 일하는 봉사자라는 것이다. 선거 때만 국민이 주인 되는 정치, 회사를 살리기도 망하게도 할 수 있는 사람은 사장이 아니라 소비자이고 종업원이라는 것을 망각하는 기업인이 있기에 정도전의 '민본' 사상이 새삼 깊은 울림을 주는 것 같다.
정도전이 유배지 전남 나주 소재동에서 쓴 소재동기(消災洞記)에 보면, 그가 기거하는 황연이란 농부 집으로 동네 사람들이 매일 찾아와 서로 친구처럼 담소하며 지냈다고 되어 있다. 답전부(答田父)라는 글에서 그는 농부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까지 보여 전부(田父)를 숨은 군자라 부르며 가르침을 달라고 요청하기까지 했다.
그는 소재동에서 3년간 유배생활을 했다. 유배가 한 인간을 다시 ‘태어나게’ 한 예는 많았다. 그에게도 유배생활은 지식인의 책무를 한 없이 느끼게 한 시련과 성장의 기간이었다. 나주에서 그는 가난(家難) 답전부(答田父) 금남야인(錦南野人) 금남잡제(錦南雜題) 금남잡영(錦南雜詠) 심문천답(心問天答) 등 여러 글을 남겼다.
귀양지 나주에서 만난 밭가는 한 농부는 정도전을 준열하게 꾸짖었다.
농부는 “불의를 돌아보지 않고서 한없이 욕심을 채우려다가, 겉으로 겸손한 체하며 헛된 이름을 훔치고, 어두운 밤에는 분주하게 돌아다니면서 애걸하고, 경상(卿相)이 되어서 제 마음대로 고집을 세우고 아첨하는 이는 즐거워하고, 국가의 형전(刑典)을 사용하다 악행이 많아 죄에 걸린 것인가”라며 집요하고도 신랄하게 따져 물었다.
농부는 당시 정치와 현실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배지에서 정도전이 얻은 것은 농사나 짓는 시골사람이라고 해서 낮게 보아서는 안 된다는 깊은 깨달음이었다. 그들이 오히려 유학자들보다 높은 식견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 국가의 조세제도에 대한 비판을 통해 건강한 시골 농민들의 눈에 중앙 관료들이 어떻게 비치고 있는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궁벽한 곳에 사는 농부의 말을 듣고 "이 나라를, 이 정치를 제대로 바로 잡아야겠다."고 분명 다짐했으리라. 어쩌면 정도전의 마음속에서 혁명의 불씨가 살아난 것은 유배지에서 농민들과의 어울림을 통해서였는지도 모른다. 농민들의 한과 설움을 통하여 그는 자신의 이론으로 무장한 유학(儒學)이 한낮 허위의식에 가득 찬 것이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실천적 의지가 없는 이론은 한갓 ‘허수아비’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가 이성계를 찾아가 혁명을 건의했고, 새로운 역사를 열어 가는데 나주 유배지가 그 씨앗이 된 것이다. 9년간에 걸친 유배와 유랑 생활은 정도전에게 깊은 깨달음을 주었다. 그가 이 시기에 얻은 것 중 가장 큰 것은 무엇보다도 ‘백성의 아픔’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마음속에서 혁명 사상으로 씨알이 굵어가게 만들었다.
일관된 개혁노선
정도전의 사상과 정치에 대한 연구는 1970년대 이후 적잖이 이뤄졌다. 정도전 연구에 가장 큰 기여를 한 학자는 한영우 교수다. 그는 1973년 ‘정도전 사상의 연구’를 출간했는데 여기서 정도전에 대한 새로운 조명을 시도했다. 한 교수는 그때까지 조선의 건국이념을 사대주의, 농본주의, 억불숭유주의로 보던 것에 맞서 민본주의와 민족적 주체성으로 제시했고, 정도전의 사상에서 그 기초를 찾았다.
현재의 기준이 아니라 당대의 기준으로 볼 때 한 교수의 견해는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고려 왕조의 쇠퇴라는 대내적 상황과 원나라에서 명나라로 교체되는 대외적 상황의 변화라는 구조적 강제의 변화 속에서 정도전은 성리학에 입각한 새로운 왕조창업이라는 전략적 선택을 모색했으며, 이는 조선 시대의 개막으로 귀결됐다.
정도전의 개혁성은 정몽주와 비교할 때 선명해진다. 정몽주가 보수적 개혁을 통한 고려의 쇄신을 자신의 정치적 목표로 삼았다면, 정도전은 조선의 개국이라는 더 큰 변화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진보적 개혁을 모색한 셈이었다. 비록 권력투쟁에 의해 희생됐지만 정도전이 설계한 조선 왕조는 20세기 초반까지 지속됐으며, 그가 제시한 일련의 정치·경제·문화의 원리는 조선사회의 이념적 기초를 제공했다.
역사적 사실이 이러했음에도 상대적으로 정도전에 대한 평가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태종과의 권력투쟁 속에서 희생됐다는 사실과 조선 왕조의 유교 사상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에서 찾을 수 있다. 이점에서 삼봉의 민본주의와 민족적 주체성을 강조한 한영우 교수의 연구는 정도전의 사상과 정치를 재평가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더불어 1998년 TV 드라마로 방영된 ‘용의 눈물’도 정도전을 새롭게 이해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막 개국한 조선의 2인자 자리를 놓고 벌이는 권력투쟁을 생생히 담은 이 드라마에서 정도전은 기존의 이미지를 벗어나 시대를 고뇌하는 동시에 권력의 향배에 민감한 인물로 그려진다. 역사 속 정도전의 실제 모습은 이 드라마 속의 인물과 매우 유사했을 것으로 보인다.
정몽주가 신념윤리의 지식인 정치가라면, 정도전은 책임윤리의 지식인 정치가다. 토지 문제를 중심으로 한 대내 정책과 대명 외교를 중심으로 한 대외 정책 모두에서 정도전은 성리학에 입각해 일관된 개혁 노선을 견지하고, 그 정책의 결과를 중시했다. 개혁을 위해 당시로는 혁명이라고 할 수밖에 없던, 실제로 ‘역성혁명’이란 표현이 사용됐던 왕조 교체를 감행했다.
사회과학의 시각에서 정도전의 사상을 흥미롭게 조명한 이는 최상룡 교수다. 최 교수는 여말선초에 활동했던 세 명의 정치가(정몽주, 이방원, 정도전)에 대한 유형화를 시도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정몽주는 ‘이념형의 정치가’, 이방원은 ‘권력형의 정치가’, 정도전은 이념과 권력의 ‘통합형의 정치가’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정몽주가 불사이군이란 신념에 기반을 두고 조선 개국에 반대했다면, 이방원은 정치 이념보다 권력의지에 철저했다. 한편 정도전은 성리학 이념에 기반을 둔 조선 왕조 건설의 프로그램을 갖고 있는 동시에 이를 위한 권력의지 또한 강력했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정치의 본질이 이념과 권력의 상호작용에 있는 한 세 사람 가운데 정도전이 가장 주목할 만한 정치가라고 평가한다.
‘왕권’이냐 ‘신권’이냐
‘삼봉집’은 정도전이 남긴 문집이다. ‘삼봉집’이 처음 간행된 것은 우왕 말년으로 추정된다. 조선 개국 후 1397년에 개간됐고, 1465년에 증손자 문형에 의해 중간됐다가 1791년 정조가 규장각에 명하여 다시 편찬하게 했다.
‘삼봉집’의 내용은 크게 시문과 ‘조선경국전’‘경제문감’‘경제문감별집’‘불씨잡변’ 등으로 이뤄져 있다. 사회과학적으로 이 가운데 특히 주목을 요하는 저작은 후자의 네 저작이다. 먼저 ‘조선경국전’은 조선 왕조 관제의 대강을 서술해 조선의 통치이념과 조직의 종합적인 체계를 제시한 저작이다. ‘주례(周禮)’에서 재상 중심의 군력 체제와 과거제도, 병농일치적 군사제도의 정신을 가져오고, 한당(漢唐)의 제도에서 부병제, 군현제, 부세제, 서리제의 장점을 수용하고 있다.
한편 ‘경제문감’은 군신의 직능과 관리 선발 방법을 다룬 ‘조선경국전’의 한 부분인 치전(治典)의 내용을 보완한 것이며, ‘경제문감별집’은 군주의 역할을 제시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불씨잡변’은 불교의 교리를 비판하고 그 사회적 폐단을 고발한 저작이다.
한마디로 정도전의 정치적 기획은 거시와 미시, 제도와 의식을 결합하고자 한 일종의 종합적 정치 프로그램이었다. 최상룡 교수는 이를 이념적 기반으로서의 ‘주자학’, 경제적 기반으로서의 ‘공전제’, 권력적 기반으로서의 ‘재상제’로 정리한다.
이 가운데 특히 주목할 것은 재상제다. ‘조선경국전’에서 정도전은 재상이 정치·경제·군사 등 모든 통치의 실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어 ‘경제문감’에서는 중국과 우리 역사에서 재상 제도의 변천을 살펴봄으로써 재상제의 타당성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설령 군주가 현명하지 못하더라도 재상이 현명하면 정치가 잘 운영될 수 있다는 견해는 정도전이 얼마나 재상제를 옹호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시대정신의 관점에서 정도전의 정치적 기획은 재상을 중심으로 권력과 직분이 분화된 합리적 관료 지배체제를 기반으로 하되, 그 통치권이 백성들의 삶을 위해 기능해야 한다는 민본주의를 추구한 것이었다. 비록 성리학에 입각한 전통적 방식이었지만, 정도전은 백성의 헤게모니 창출을 위한 토지제도를 포함한 일련의 제도개혁을 중시했으며, 이러한 제도개혁을 통해 부국강병을 실현하고자 했다. 어떻게 보면 정도전은 행운의 ‘지식인 정치가’라고 할 수도 있다. 구조적, 역사적 조건의 이완이 진행되던 시기에 왕조 교체라는 가히 혁명적인 전략적 선택을 추진했고 또 성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도전의 재상제는 새로운 정치적 긴장을 내포하고 있었다. 한영우 교수가 적절히 지적하듯이 정도전이 재상권 강화를 주장한 것은 현실적으로 자신이 정치적 실권을 가지려는 의도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성리학적 정치질서가 재상 중심 체제를 강조한 것 또한 사실이다.
왕조의 정치를 군주 중심으로 할 것인지, 재상 중심으로 할 것인지는 결국 왕권(王權)과 신권(臣權) 가운데 어느 것을 중시할 것인지를 묻는 것으로 전통사회 정치의 최대 문제 가운데 하나다. 조선 전기에 이 문제는 ‘경국대전’에서 재상 중심 체제라는 다소 애매한 형태로 규범화됐지만, 이 이슈를 둘러싼 논쟁은 이후 조선 시대 내내 되풀이됐다. 사회학적으로 전통사회에서 근대사회로의 변동은 그 권력의 원천이 왕에서 국민으로 이행되는 것이 특징이다. 하지만 전통사회에서도 재상제를 둘러싼 논란에서 볼 수 있듯이 군주와 관료 사이의 경쟁은 대단히 치열했다.
정도전의 이러한 정치철학에는 자신의 비극적 결말이 배태돼 있던 것으로 보인다. 왕권보다 신권을 중시한 그의 정치관은 왕권 세력에는 불만일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정도전은 사병(私兵) 혁파를 주도함으로써 당시 사병을 보유하고 왕권을 대표하던 이방원과 맞설 수밖에 없었다. 고려를 지키고자 했던 정몽주 세력에 맞서 함께 힘을 모았던 이들은 다시 권력을 놓고 경쟁하지 않을 수 없게 됐으며, 이 와중에서 정도전은 결국 패배하고 만다.
정몽주와 정도전이 활동했던 주요 무대는 지금은 갈 수 없는 고려의 수도 개경이다. 조선을 개국한 이후 정도전은 여기 서울에도 적잖은 흔적을 남겨놓았다. 정도전은 한양으로의 천도를 주도하고 궁궐, 도성문, 그리고 방의 이름을 지었다. 서울을 대표하는 궁궐인 경복궁의 네 문과 주요 전각의 이름을 지은 이도 정도전이었다.
“때는 양주 고을이여 / 시위에 신도 경승이셨다
(중략)
앞은 한강수여, 뒤는 삼각산이여
덕중하신 강산 좋으매 / 만세 누리소서”
조선 개국공신 정도전(삼봉)이 태조의 명을 받고 풍수지리에 입각한
조선 팔도 인물평을 한 일이 있는데 오늘날 까지도 통한다하여 올려봅니다.
경기도: 경중미인(鏡中美人)= 거울속의 미인처럼 우아하고 단정하다
함경도: 이전투구(泥田鬪狗)= 진흙 밭에서 싸우는 개처럼 맹렬하고 악착스럽다
평안도: 맹호출림(猛虎出林)= 숲 속에서 나온 범처럼 매섭고 사납다
황해도: 석전경우(石田耕牛)= 거친 돌 밭을 가는 소처럼 묵묵하고 억세다
강원도: 암하노불(巖下老佛)= 큰 바위 아래에 있는 부처님처럼 어질고 인자하다
충청도: 청풍명월(淸風明月)= 맑은 바람과 큰 달처럼 부드럽고 고매하다
전라도: 풍전세류(風前細柳)= 바람결에 날리는 버드나무처럼 멋을 알고 풍류를 즐긴다
경상도: 태산준령(泰山峻嶺)= 큰 산과 험한 고개처럼 선이 굵고 우직하다
이성계가 정도전에게 조선팔도 사람을 평하라고한 적이 있다.
그러자 정도전은“경기도는 경중미인(鏡中美人)이고,
충청도는 청풍명월(淸風明月)하고,
전라도는 풍전세류(風前細柳)이며,
경상도는 송죽대절(松竹大節)하고,
강원도는 암하노불(岩下老佛)하고,
황해도는 춘파투석(春波投石),
평안도는 산림맹호(山林猛虎) 입니다.”라고 평하였다 한다.
이 말을 풀자면,
경기도는 거울에 비친 미인과 같고,
충청도는 맑은 바람 속의 밝은 달과 같으며,
전라도는 바람 앞의 가는 버들과 같으며,
경상도는 소나무나 대나무와 같은 큰 절개를 가졌고,
강원도는 바위 아래의 늙은 부처님과 같고,
황해도는 봄 물결에 돌을 던지는 듯하고,
평안도는 숲 속의 사나운 호랑이와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성계의 출신지인 함경도에 대해서는 평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태조는 아무 말 이라도 좋으니 어서 말하라고 재촉하였다.
그러자 정도전은 머뭇거리며“함경도는 이전투구(泥田鬪狗) 이옵니다”라고 말을 하였다.
그러자 태조 이성계는 이 말을 듣고 얼굴이 벌개졌다고 하는데,
눈치 빠른 정도전이 이어 말하길“그러하오나 함경도는 또한 석전경우(石田耕牛)올시다”하니
그제야 용안에 희색이 만연해 후한 상을 내렸다고 한다.
이전투구라는 말은 진흙탕에서 싸우는 개라는 뜻으로 강인한 함경도 사람의 성격을 평한 말이다.
그러나 오늘 날에는 명문이 서지 않은 일로 몰골사납게 싸우는 모습이나
체면을 돌보지 않고 이익을 다투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석전경우라는 말은 자갈밭을 가는 소라는 뜻으로 부지런하고
인내심이 강한 성격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八道江山七言詩
-팔도강산 칠언시
-泰山高嶽 望夫士高節淸廉先輩道-경상도
-태산고악 망부사 고절청렴 선배도
-岩下老佛 天理達金剛山名古今宗-강원도
-암하노불 천리달 금강산명 고금종
-風前細柳 時節路倫理道德崇尙道-전라도
-풍전세류 시절로 윤리도덕 숭상도
-明月淸風 廣山照忠孝全心傳授統-충청도
-명월청풍 광산조 충효전심 전수통
-鏡中美人 貪色慾世間情慾相爭同-경기도
-경중미인 탐색욕 세간정욕 상쟁동
-石中耕牛 苦力中播種收穫勞績功-황해도
-석중경우 고력중 파종수확 노적공
-深山猛虎 出入麓萬疊靑山嘉節中-평안도
-심산맹호 출입록 만첩청산 가절중
-四海八方相親樂泥田鬪狗解願躬-함경도-사해팔방 상친락 니전투구 해원
조선의 찬란함..세계사에도 드문 같은 성씨 한 왕조를 500년 유지하게 한 힘. 약소국으로 그 많은 외침을 버티고, 한글과 과학문명을 유지한 힘. 세계사에 드문 조선왕조신록을 남겨 국왕의 모든 정치과정을 기록한 국가..등등..이 모든 조선을 유지하는 힘에는 정도전의 사상이 있었다네요..
정도전은 단순한 혁명가,,사상가,,행정가를 넘어서 조선건국의 총설계자 이고,,실질 이성계 가문의 왕가로 옹립은 하지만...조선의 SW(소프트웨어)는 거의 전부 정도전의 머리에서 설계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조선의 총설계자이고, 한양 수도천도(오늘날 서울 건설의 사실상의 주역?)와 경복궁 건설과 모든 전각의 이름을 다 짓고, 진법(군사학)의 대가였으며, 요동정벌을 꿈꾼 정도전을 왜 이방원이 죽여야 했을까요? 그것은 권력투쟁이었습니다..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와 정도전은 같은 입장에 있었다고 합니다.
정몽주를 죽이고, 개국에 기여한 둘째 이방원은 강력한 무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그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면,,태조 이성계 이상의 강력한 왕권을 휘두를 가능성이 컷다네요..
계비 신덕황후는 자신과 그 아들이 살고,,, 정도전은 신권정치...왕권 보다는 군주와 신하가 권력의 조화를 이루는 신권사회를 꿈꾸다보니...적통의 강한 아들 이방원 보다는 계비 신덕왕후의 둘째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는 것이 맞다고 본 것 같습니다..
.
그래서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고,,군권을 장악한 정도전은 요동정벌을 위해 사병의 혁파를 모색합니다..이에 이방원은 사병마저 빼앗기면 영원히 복귀할 수 없다고 보고, 왕자의 난으로...정도전과 세자 방석을 죽이게 됩니다..
물론 정도전의 죽음은 태종의 왕권강화로 이어졌고,,,태종은 태조 이성계 이상의 강력한 왕권을 휘두르면서.. 처가 민씨 일가 사병마저 혁파함으로써 영원히 도전세력을 무력화시킵니다.
조선의 모든 SW를 제공하고,,, 실질 불교사회인 고려를 유교사회인 조선으로 바꾸는 실질적인 개혁가였지만. 강력한 중앙집권과 왕권을 원했던 이방원에 의해,,신권정치, 왕도정치를 표방한 정도전은 조선시대 460년간 철저히 간신으로 치부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정도전을 복권한 사람은 아이러니 하게도 흥선대원군입니다..
경복궁을 중건해서 왕실의 위엄을 내세우고자 햇던 흥선대원군은 그 경복궁을 만들고 한양천도를 주도했던 정도전을 간신에서 충신으로 명예회복 시킵니다...그래서 태조 이방원에 의해 버려진 정도전이 흥선대원군에 의해 460년 만에 역사의 인물로 등장하는 것이죠...
조선의 총설계자였던 정도전이 460년간 간신의 우두머리로 치부된 역사...
이방원에게 죽은 정몽주는 충신으로 누세에 기억되었지만,, 정도전의 재평가는 무려 5세기 참 시간이 많이 걸렸다네요...ㅎ
하륜이라는 인물을 평가할 때는 대개 이방원이 그의 능력을 알아보고 발탁한 것으로 기록한다. 실제로 이방원의 두터운 신임이 없었다면 그는 크게 출세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하륜이 스스로 왕이 될 재목을 알아보고 이방원을 선택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하륜과 이방원의 운명적인 만남에 대해서 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하륜은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민제(閔霽)와 뜻을 같이하는 친구였는데, 하륜이 본래 사람의 상을 보는 것을 좋아해 민제에게 말하기를 “내가 사람의 상을 본 적이 많지만 공(公)의 둘째 사위 같은 사람은 없었소. 내가 뵙고자 하니 공은 그 뜻을 말하여 주시오.” 했다. 민제가 태종에게 말하기를, “하륜이 군(君)을 보고자 한다.” 했다. 태종이 만나 보니, 하륜이 드디어 마음을 기울여 섬겼다.
《태종실록》, 총서
관상에 능했던 하륜이 이방원의 풍모를 보고 크게 될 인물임을 알아보고 먼저 접근했다는 것이다. 그 후 이방원과 하륜은 그야말로 이심전심 뜻을 맞춰나갔다.
1398년(태조 7), 충청도 관찰사였던 하륜은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서울로 올라와 이방원을 도왔다. 앞장서서 손에 피를 묻혀 가며 정적 제거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막후에서 기획하고 지휘한 사람은 하륜이었다.
정도전이 사병 혁파를 통해 이방원을 비롯한 신의왕후 한씨(이성계의 첫 번째 부인) 소생의 왕자들을 무장 해제시키자 이방원은 하륜으로 하여금 지안산군사(知安山郡事) 이숙번(李叔蕃)이 유사시에 언제든지 올라올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게 했다.
이와 관련해 《용재총화(慵齊叢話)》에는 주도면밀하게 ‘이방원 왕 만들기’를 준비한 하륜의 일화가 전해진다. 하륜이 실세인 정도전의 미움을 받아 지방 관직인 충청도 관찰사로 내려가게 되었다. 지인들이 환송연을 열어주었고, 이 자리에 이방원도 참석했다. 이방원에게 은밀히 자신의 뜻을 전하고자 기회를 엿보던 하륜은 짐짓 취한 척을 하고 이방원의 옷에 술을 쏟았다. 이방원이 화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 나가자 하륜은 “정안군(靖安君)에게 사과를 해야겠다.”며 따라나섰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이방원과 둘만 있는 시간을 마련한 하륜은 이방원에서 정도전의 무력시위에 대비하라고 조언했다. 이에 이방원은 하륜의 뜻을 알아차리고 제1차 왕자의 난으로 권력의 주도권을 쥘 수 있었다. 실록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하륜이 일찍이 임금의 잠저(潛邸)에 나아가니, 임금이 사람을 물리치고 계책을 물었다. 하륜이 말하기를 “이것은 다른 계책이 없고 다만 마땅히 선수를 쳐서 이 무리를 없애는 것뿐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이 없었다. 하륜이 다시 “이것은 다만 아들이 아버지의 군사를 희롱하여 죽음을 구하는 것이니, 비록 상위(上位)께서 놀라더라도 필경 어찌하겠습니까?” 하였다.
《태종실록》 권32, 태종 16년 11월 6일, 진산 부원군 하륜의 졸기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하륜은 이방원의 오른팔이 되어 정국을 주도하는 실세로 등장했다. 정도전 등의 정적을 제거한 이방원은 왕좌를 향해 거침없는 질주를 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언제나 하륜이 있었다. 제1차 왕자의 난으로 공석이 된 세자 자리에 이방원을 올리려고 한 것도, 정종을 왕으로 삼게 한 것도 하륜이었다. 하륜은 이방원을 대신해 세간의 곱지 않은 시선을 온몸으로 받았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먼저 나서서 이방원이 뜻을 펼 수 있도록 길을 텄다. 덕분에 하륜은 정종 즉위 후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으로 진산군(晉山君)에 봉해졌다. 하륜은 이미 이때부터 재상의 반열에 올라 조선의 통치 제도를 정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학벌도 신통치 않는데 튀면 다친다, '튀지 말자'
경상도 진주가 본향인 하륜은 공민왕 9년 국자감시 문과에 합격하여 중앙무대에 진출했다. 이때의 좌주(座主)가 이인복이다. 고려시대 과거 시험관을 좌주라 부르고 좌주는 급제자를 문생이라 불렀다. 이것이 오늘날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학벌의 비조다. 이들의 관계는 평생 부자와 같은 관계를 유지했다. 정몽주, 이색과 같은 당대의 거유를 좌주로 모시지 못한 하륜은 변방을 떠돌며 학벌의 설움을 톡톡히 당했다.
조정에 출사한 하륜은 감찰규정(監察糾正) 감투를 쓴 혈기로 당대의 권세가 신돈의 문객 양전부사(量田副使)의 비행을 탄핵하다 파직된 후 복직했다.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 시절 최영의 요양 출병을 반대하다 양주에 추방되었다. 두 사건을 거치며 '학맥도 신통치 않은 자가 튀면 다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하륜은 철저히 전면에 나서는 것을 피했다. 이러한 방어적인 자기 관리가 관운을 길게 했는지 모른다.
정도전이 끌고 가는 스타일이라면 하륜은 밀고 가는 스타일이었다. 정도전이 조선을 설계한 사람이라면 하륜은 도편수였다. 정도전이 무에서 유를 창조한 사람이라면 하륜은 주어진 도면에 따라 못질을 하고 흙을 발랐던 사람이다. 정도전이 동북아에 조선을 등장시킨 사람이라면 하륜은 조선이라는 테두리 내에서 태평성대를 고민한 사람이었다.
혁명가와 혁명가는 상극이고 이방원과 하륜은 궁합이 맞았다
정도전이 기획과 추진력을 겸비한 혁명가적 학자라면 하륜은 구상과 실천력을 겸비한 행정가적 학자였다. 혁명가와 혁명가는 상통하지만 상생하지 못한다. 혁명가와 행정가는 상이하지만 상생한다. 혁명가와 혁명가는 상극이다. 만나면 부딪친다. 때문에 이방원과 정도전은 극(剋)했고 이방원과 하륜은 상생(相生)했다. 한마디로 이방원과 하륜은 궁합이 맞았던 것이다.
하륜의 사망소식이 한양에 알려지자 대궐은 깊은 슬픔에 빠졌다.
"동북면은 왕업을 시초한 땅이고 조종(祖宗)의 능침이 있으므로 사신을 보내어 돌아보고자 했는데 실로 적합한 사람이 어려웠다. 경의 몸은 비록 쇠하였으나 왕실에 마음을 다하여 먼 길 수고하는 것을 꺼리지 않고 스스로 행하고자 하였다. 나도 또한 능침이 중하기 때문에 경에게 번거롭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외에 나가서 전송한 것이 평생의 영결(永訣)이 될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태종은 애석함에 눈물을 흘렸다. 좌하륜 우숙번이 주변에서 멀어져 갔다. 하륜은 세상을 떠났고 숙번은 한양을 떠났다. 아직도 해야 할 일이 산같이 많은데 누구와 상의하여 처결해 나가야 한단 말인가? 당장에 세자가 문제다.
"슬프다. 죽고 사는 것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길이다. 경이 그 이치를 잘 아니 무엇을 한(恨) 하겠는가. 다만 철인(哲人)의 죽음은 나라의 불행이다. 이제부터 대사에 임하여 대의(大疑)로 결단하고 추호의 흔들림 없이 국가를 반석의 편안함으로 이끌 사람을 내가 누구를 바라겠는가? 이것은 내가 몹시 애석하여 마지않는 것이다. 특별히 예관(禮官)을 보내어 영구(靈柩) 앞에 치제(致祭)하니 영혼이 있으면 이 휼전(恤典)을 흠향하라."
태종은 예조좌랑(禮曹佐郞) 정인지를 함흥에 보내 영전에 사제(賜祭)하라 일렀다. 슬픔에 잠긴 태종은 3일 동안 신하들의 조회를 폐하고 7일 동안 고기가 들어있는 음식을 들지 않았다. 임금으로서 신하에 대한 최고의 예우다.
객지에서 지아비를 잃은 하륜의 부인 이씨가 승정원(承政院)에 탄원하였다.
"가옹(家翁)이 왕명을 받들어 외방에서 죽었으니 원컨대 시신을 집에 들여와 빈소를 차리게 하소서."
집을 떠난 객사자(客死者)는 집에 들여오지 않는 것이 상례(喪禮)였다. 태종은 예조에 명하여 예전 제도를 살펴 보고하라 명했다.
"예기(禮記) 증자문편(曾子問篇)에 '사명을 받들다 죽은 대부(大夫)와 사(士)는 마땅히 집에 돌아와 염(殮)하고 초빈(草殯)하여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속내를 털어놓던 신하가 돌아왔건만 말이 없다
예조의 보고를 받은 태종은 하륜의 시신을 한양으로 운구하라 명했다. 파격이다. 하륜은 살아 넘었던 철령을 죽어서 넘어왔다. 눈 덮인 개골산을 보고 싶어 했던 하륜이 구의(柩衣)에 덮여 금강산 자락을 넘었다.
하륜의 시신이 한양에 도착했다. 한 달 전, 임금의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한양을 떠났던 하륜이 싸늘한 시신이 되어 돌아왔다. 남산에 횃불을 밝히고 무인혁명을 성공으로 이끌었던 하륜이 주검으로 돌아왔건만 횃불은 꺼져 있었다.
혁명전야, '다른 계책이 없습니다. 먼저 선수를 써 무리를 쳐 없애는 것뿐입니다'라고 망설이던 이방원을 설득하던 하륜이었건만 말이 없다. 광화문 앞 천막에서 '아들이 아버지의 군사를 희롱하여 죽음을 구하는 것이니 비록 상위(上位)께서 놀라더라도 필경 어찌하겠습니까?'라고 당위성을 역설하던 하륜이건만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이무(李茂)가 득죄하여 온 조정의 대신들이 그의 목을 베기를 청하였을 때. 하륜이 홀로 반대했다. 임금의 의지에 반하는 발언은 목이 떨어질 수 있다. 그러한 위험을 무릅쓰고 반대한 것이다. 태종이 대답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며 말하기를 '하륜이 죽일 수 없다고 하니 이것은 실로 그 마음에서 발한 것이다' 하였다. 이렇게 속내를 털어놓고 지내던 임금과 신하이지만 오늘은 말이 없다.
한양에 빈소가 마련되자 문상객이 구름처럼 밀려들었다. 천성적인 자질이 온화하고 말수가 적어 많은 사람이 따랐다. 평생에 빠른 말과 급한 빛이 없어 실수가 적었다. 태종과 함께 한 16년 동안 많은 사람을 챙겼고 요직에 심었다.
태종은 경상좌도 병마도절제사(慶尙左道兵馬都節制使)로 있던 하륜의 사위 이승간에게 한양에 올라오도록 허락했다. 군인은 장졸을 불문하고 근무지를 이탈하는 것을 엄격히 금하는 것이 군법이다. 시신을 한양으로 운구하게 하고 군인 사위를 불러올리는 것은 모두 파격이었다.
세자 양녕대군이 하륜의 빈소에 제사하고 임금이 친히 사제(賜祭)하였다. 원로대신에 대한 최고의 예우다. 빈소를 찾은 태종이 말을 꺼냈다.
"국장(國葬)으로 하는 것이 옳을 듯하오."
"국장으로 번거롭게 하지 말고 가인(家人)을 시켜 장사하라. 고 하륜이 유언했다 합니다."
지신사 조말생이 하륜 가족의 얘기를 전했다.
시대를 앞서 살았던 선각자, 영원히 잠들다
"대신(大臣)의 예장(禮葬)은 나라의 상전(常典)인데 하륜의 공덕이 국장으로 손색이 없지를 않소?"
태종은 아쉬웠지만 하륜의 유언과 부인의 청을 받아들여 국장은 생략했다. 그 대신 국장도감(國葬都監)에 명하여 구의(柩衣), 단자(段子), 견자(絹子) 각각 1필, 상복(喪服)에 쓰는 정포(正布)17필, 혜피(鞋皮) 2장을 하륜의 집에 보냈으나 부인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하륜의 장례는 조용히 가족장으로 치러졌으며 선영이 있는 진주 미천면에 묻혔다.
하륜이 주창한 저화(楮貨) 사용과 순제 운하를 정도전과 같은 추진력으로 강행했다면 조선의 경제는 달라졌을 것이다. 6백년이 흐른 오늘날에도 운하가 경제의 효자다. 애물단지다. 갑론을박 현안으로 회자되고 있는데 아득히 먼 6백 년 전에 오늘날의 지폐에 해당하는 저화 사용을 시행했고 삼남지방과 연결하는 운하를 파자고 주장했으니 선각자임에는 틀림없다.
정도전이 조선이라는 국가 정체성과 경제육전(經濟六典) 같은 뼈대를 중시한 반면 하륜은 실질적인 경제를 부흥시키려는 실용주의자였다. 그릇의 크기는 차이가 났지만 두 사람 모두 우리나라에는 소중한 사람이었다. 이 두 사람이 깔아놓은 초석이 있었기에 조선 5백년이 가능했는지 모른다.
책사 하륜, 치수로 태종을 보필하다。
조선조 5백 년 동안의 틀 잡기와 기반 마련은 태종의 책사 하륜의 손을 거쳐 만들어진 것이 대단히 많았다. 그럼에도 그는 교만하지 않았고 철저하게 태종의 뒤에 서서 부창부수의 리더십을 선보였다. 하륜은 신생 조선의 제도와 법질서, 행정의 체계적 운영을 실현한 전형적인 관료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그는 풍수와 치수의 대가로, 한편으로는 청계천 태안반도 한강 등의 치수를 기획하고 실현한 현장형 지도자이기도 했다.
하륜, 그의 치수의 리더십을 살펴보자.
서울 도심이 물에 잠기다、
조선이 건국되고 수년간 6~7월이면 장맛비가 내리면서 인왕산 북한산에서
내려온 빗물과 도심 개천의 빗물이 합쳐지며 서울이 물구덩이가 되는 일이 번번했다. 게다가 수도를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겨오면서 궁궐과 민가가 크게 늘어나 물길이 한데 몰리는 바람에 경복궁 앞까지 물이 차오르는 물난리를 겪었다. 실록도 태종 7년 7월초에 큰 비가 내려 서울 도심의 개천이 모두 넘쳤다고 기록하고 있을 정도다.
태종은 조선왕국 건설 후 계속되는 홍수에 골머리를 썩었다. 이를 고민하던 태종에게 하륜 등 신료들은 개천 준설을 제안하기에 이른다. 태종은 왕명으로 개천도감을 설치하고 비교적 풍년이 든 경상도 전라도에서 군사를 동원하여 둑방을 돌로 쌓으며 홍수에 대비한 수방책을 세웠다.
이것이 바로 청계천이었다. 그러나 강제로 끌려온 백성들과 가족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강하고 패기 넘치는 왕이었으나 백성들에게는 한없이 약한 태종은 신료들에게 이를 걱정했다.
"해마다 장마 비에 시내가 불어나 물이 넘쳐 민가가 침몰되니, 밤낮으로 근심이 되어 개천길을 열고자 한 지가 오래이다. 이번 이 일(청계천 준설)이 백성에게 폐해가 없겠는가?" 그러나 하륜이 직접 나서서 청계천 준설은 수도 안정과 방비 및 국가의 장래에 꼭 필요한 옳은 일이니 멈추지 말고 진행하고자 독려했다. 하륜은 물길을 안정시키지 않고 정국의 불안정을 해소할 수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가뜩이나 해마다 일어나는 홍수 때문에 개성에서 시작한 조선 왕도를 괜스레 왕기가 쇠한 곳으로 이전하여 나라의 장래가 걱정되느니 어쩌니 하는 불평들이 터져 나오는가 하면 망국 고려의 유신들이 공공연하게 피로 일어난 나라는 피로 망할 것이라는 유언비어를 흘리고 다녔다.
민심을 잠재우지 않고 왕국의 미래를 안정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 하륜의 생각이었다. 결국 장의동(藏義洞) 어귀로부터 종묘동(宗廟洞) 어구까지 문소전(殿)과 창덕궁(昌德宮)의 문앞을 모두 돌로 쌓고, 종묘등 어귀로부터 수구문(水口門)까지는 나무로 방축(防築)을 만들고, 대.소광통(大小廣通)과 혜정(惠政)및 정선방(貞善坊) 동구(洞口).신화방(神化坊) 동구(洞口)등의 다리를 만드는 데는 모두 돌을 쓰는 대규모 토목 사업
끝에 청계천이 완성되었다.
1412년 2월 15일의 일이었다. 동원된 군사만 5만 2,800명이었고 공사 기간 중에 죽은 자는 64명이나 되었다. 오늘의 청계천은 그때 시작된 것이니 600년 인고의 세월을 간직한 역사의 증인인 셈이다. 그 청계천은 말도 많았다. 준설한 후에도 큰물이 넘쳐 홍수가 나는가 하면 태종 18년에는 표범이 청계천에 나타나 사람들이 악전고투 끝에 잡아 병조에 넘겨주는 일도 벌어졌다. 그러나 수표를 세우고 물길을 측량함으로써 정국을 안정시키는데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었다.
태안반도와 경인운하를 기획하다、
하륜은 후일 명나라 방문 후 조선에 부족한 것 중 하나로 물자수송을 염려했다. 한 나라의 경제가 수도에서 지방으로 잘 흘러가고 각 지역의 특산물이 또 사도로 잘 흘러들어오는 것이 곧 경제력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를 위해 하륜은 획기적인 발상을 내놓았다. 태종 12년 11월 충청도 순제
안흥량에 운하를 파자는 거대한 계획이었다. 지금의 태안반도다.
하륜은 고려 때 시도하려다 말았던 태안반도 운하 계획을 들고 나와 "지형의 높낮이에 따라 제방을 쌓고 물을 가두어 제방마다 작은 배를 둔 다음, 둑 아래를 파서 조운선이 포구에 닿으면 그 소선에다 짐을 옮겨 싣고 둑 아래에 이르러 다시 둑 안에 있는 소선으로 옮겨 실으면 안전한 소통이 가능하다."는 구체적인 아이디어까지 내놓았다.
전라도에서 올라오는 세금(쌀과 피륙)을 실은 조운선이 이곳에서 침몰되는 일이 잦았기에 하륜이 해결책을 낸 것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은 해당 지세가 암반으로 되어 있어 뚫기 힘들다 하여 결국 중지되고 말았다. 이 운하는 결국 대동법의 선구자 김육에 의해 200년 후 일부 준설되어 하륜의 꿈이 불가능한 일이 아님을 입증해 주었다.
그는 이 계획이 실현되지 못하자 다시 다른 계획을 내놓았다.
1413년 태종 13년 7월 20일이었다.
"경기도의 군인 1만 명, 수도의 대장(隊長). 부대장 4백 명, 군기감(軍器監)의 별군(別軍) 6백 명, 모두 1만 1천 명을 징발하여 양어지(養魚池)를 파고, 숭례문(崇禮門)밖에 운하를 파서 선박을 통행하게 하자."
태종은 이 계획을 좋게 보았으나 만약에 운하를 팠다가 땅에 다 스며들어버리면 백성들만 수고하게 될 것을 염려하여 이를 허락하지 않아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하지만 하륜은 실망하지 않고 평생을 공직자로서 검소하게 살며 태종의 치수와 정국 안정시책에 최선을 다한 진정한 참모로 처신해 후학들의 칭송을 받았다.
'Education > 교직 연수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학교폭력 학부모, 학생 교육 자료 (0) | 2013.01.14 |
---|---|
‘STEAM’ 어떻게 이해하고 적용할 것인가? (0) | 2012.12.26 |
토론수업 교재 및 수업안 (0) | 2012.04.17 |
브레인라이팅 토론수업 지도안 (0) | 2012.04.11 |
회의, 모임의 종류 (0) | 2011.11.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