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동회 모임을 옥천군립 장령산자연휴양림에서 갖기로 했다.
서울에서 내려 올 친구와 대전에 사는 친구를 배려해서 정한 장소이다.
대구에서 세 내외가 10시 30분경 출발해서 중간에 점심을 먹고
장령산자연휴양림에는 15시경 도착할 예정이었다.
점심은 인터넷 검색을 해서 찾은 맛집 '배바우 손두부"를 찾았다.
맛집답게 손님이 많았다.
점심시간이 좀 지났는데도 아직 많은 거 보면 맛집인가 보다.
메뉴는 올갱이두부전골 2상을 주문했다.
곁들여서 한방막걸리(알밤막걸리)도 한잔씩 .....
올갱이와 손두부가 듬뿍 들어간 올갱이두부전골!
6명이 2개 시켰는데 너무 많아 다 못먹을 것 같았지만 어느새 싹 비웠다.
점심을 먹은 후 가까이에 있는 육영수 여사 생가를 둘러 보기로 했다.
여느 생가보다 규모가 크고 넓었다.
추운날에도 생가를 방문하는 여행객들이 많았다.
석빙고까지 갖춘 부잣집 따님이셨네!
다음코스는 시 "향수"로 유명한 시인 정지용(鄭芝溶, 1902 ~ 1950) 생가
정지용(鄭芝溶, 1902 ~ 1950)의 본관은 연일(延日). 충청북도 옥천(沃川) 출신. 아명(兒名)은 태몽에서 유래된 지용(池龍)이고 세례명은 프란시스코(方濟角)이다. 가끔 ‘지용’으로 작품을 발표하고 있을 뿐이며, 여타의 아호(雅號)나 필명은 없다.
고향에서 초등 과정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와 휘문고등보통학교(徽文高等普通學校)에서 중등 과정을 이수했다.
그리고 일본으로 건너가 경도(京都)에 있는 도지사대학(同志社大學)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귀국 후 곧바로 모교인 휘문고등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8·15광복과 함께 이화여자대학교 문학부 교수로 옮겨 문학 강의와 라틴어를 강의하는 한편, 천주교 재단에서 창간한 경향신문사의 주간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리고 무슨 까닭인지 확인된 바 아니나, 이화여대 교수직과 경향신문사 주간직은 물론, 기타의 공직에서 물러나 녹번리(현재 은평구 녹번동)의 초당에서 은거하다가 6·25 때 납북된 뒤 행적이 묘연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최근 평양에서 발간된 「통일신보」(1993.4.24., 5.1., 5.7.)에서 가족과 지인들의 증언을 인용해 정지용이 1950년 9월경 경기도 동두천 부근에서 미군 폭격에 의해 사망했다는 사실을 보도하기도 했다.
그의 행적에 대한 갖가지 추측과 오해로 그의 유작의 간행이나 논의조차 금기되다가 1988년도 납·월북작가의 작품에 대한 해금 조치로 작품집의 출판과 문학사적 논의가 가능하게 되었다.
아담한 초가였지만 정감이 가는 생가였다.
생가 바로 옆에 있는 "정지용 문학관" 역시 규모는 작았지만 지겹지 않게 관람할 수 있었다.
15시경에 자연휴양림에 도착하여 체크인하고 대전, 서울친구를 기다렸다.
대전에 사는 친구는 토끼를 사서 준비를 해 왔는데
여자분들은 요리하기를 꺼려서 남자들이 밥하고 요리를 하고
또 설겆이를 했다. 토끼요리는 모두 처음이란다.
19시가 되어서야 서울친구 내외가 도착했는데
늦은 저녁이지만 같이 먹을 수 있어서 좋은 시간이었다.
저녁시간이 되니 눈이 오기 시작했다.
15년만의 세계적인 한파란다.
서해안 쪽으로는 폭설, 제주 비행장에서는 비행기가 못 떠서
9만여명이 발이 묶였단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전날보다 더 많은 눈이 내려 있었다.
일정을 단축하여 길이 트이는 데로 대구로 돌아오기로 했는데
추풍령을 지나니 경북, 대구쪽으로는 눈이 온 흔적이 없었다.
장령산자연휴양림 휴양림관(유리창관)의 새벽
밤새 눈을 맞으며 추위를 이긴 나의 애마 3201
동이 틀 무렵의 장령산